폰테크 합법 14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인근. 서울 퀴어퍼레이드 참가자들이 행진하자 일부 보수 기독교 신자들이 성소수자 혐오 발언이 섞인 말과 함께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다. 참가자들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며 그들을 지나쳤다.
이내 ‘무지갯빛 사랑’이 혐오를 덮었다. 노란 도화지에 손글씨로 ‘여러분 사랑해요’라고 적은 손팻말을 들고 길가에서 “사랑한다”고 외치는 참가자가 나왔다. 참가자들은 환호했다. 팻말을 들고 있던 이정민씨(24)는 “결국 사랑이 이길 것”이라며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 남대문로·우정국로 일대에서 제26회 서울퀴어퍼레이드(퀴퍼)가 열렸다. 올해 슬로건은 “우리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다.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단순한 선언이 아닌 우리가 살아낸 지난 25년의 역사이며, 함께 나아갈 다음 25년의 약속”이라며 “더 많은 사랑을 위해, 더 넓은 연대를 위해 다시 우리의 축제를 열 것”이라고 밝혔다.
축제는 오전 11시 서울 지하철 을지로입구역 2번 출구 앞 입구 근처에서 ‘무지개 너머 무지개 축복식’으로 시작됐다. 대한성공회 용산나눔의집 원장 사제 자캐오 신부, 이동환 목사를 비롯해 목회자 약 40명이 참여했다. 목회자들은 “나와 너, 세상의 아픈 자리 가운데 위로와 연대를 전하는 무지개빗 사람들을 축복한다”고 말하며 참가자들을 향해 ‘축복의 꽃잎’을 뿌렸다.
축제에는 ‘퀴퍼 1년차’부터 ‘N년차’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유아차를 탄 아이, 남편과 함께 참여한 박수지씨(36)는 “퀴어에 열려있는 아이로 자라길 바라서 아이가 태어나고는 처음 함께 왔다”며 “서울시청 광장에서 집회가 열릴 때보다 ‘혐오 세력’의 목소리가 작아져서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손성호씨(45)는 “나이가 이 정도 되니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주위 사람들한테 커밍아웃을 했는데, 대충 다 알고 있더라”라며 “이렇게 많은 사람과 행진할 수 있다니,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날 서울퀴퍼에는 노동조합, 시민단체, 기업, 외국 대사관 등 ‘각양각색’의 부스가 운영됐다.
퀴어 커플들이 ‘혼인·생활동반자 신고서’를 쓸 수 있는 부스도 마련됐다. 손을 꼭 잡고 부스 앞에 선 커플들은 ‘혼인·생활동반자 신고서’를 썼다 신고서에 적을 ‘증인’으로 서로를 적기도 했다. ‘마당극 민중의 부활’이 만든 거리극에 참여하는 이들이었다. 현행 민법은 이성 간의 결합만 혼인으로 해석하지만, 이 극은 2026년 생활동반자법·차별금지법이 통과된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혼인 신고가 끝나면 “결혼을 축하한다”며 3~4명이 둘러싸고 축하했다. 축가로는 “내게 언제의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면 바로 지금”이라는 가사를 담은 재쓰비의 <너와의 모든 지금>이 울려 퍼졌다.
질병관리청, 언론노조 등은 퀴퍼에 올해 처음 부스를 냈다. 질병청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예방과 노출 전 예방요법(PrEP)에 대한 홍보 자료를 배포하는 등 활동을 했다. PrEP은 HIV 예방을 위해 항레트로바이러스 약물을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데, 의사에게 처방받은 대로 약을 복용하면 HIV 감염을 90% 이상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언론노조 성평등위원회는 성소수자 인권 보도준칙을 만들어 배포하고, 언론 기사 제목 중 ‘최악’을 꼽는 설문도 했다. 김지경 언론노조 성평등위원장은 “언론인 중에서도 성소수자가 있을 텐데, 적극적으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알려진 동료가 많지 않다”며 “성소수자 언론인이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조직 문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부스를 냈다”고 말했다.
[플랫]인권위의 퀴어축제 ‘불참’ 규탄한 시민들…“혐오 앞에 중립 없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공식적으로 불참해 대신 ‘인권위 앨라이(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들) 모임’이 운영하는 부스가 설치됐다. 인권위는 2017년부터 서울퀴퍼에 참여해왔는데, 안창호 인권위원장 체제의 인권위는 ‘동성애 반대 집회’에서도 참가 요청이 들어오자 “한쪽만 참여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며 퀴어문화축제 불참 의사를 밝혔다. 모임을 이끄는 최준석 인권위 성차별·성소수자 전문관은 “여러 부침에도 불구하고 20년 넘게 인권위가 지향해왔던 가치가 위원장이 바뀐 뒤 하루아침에 뒤집혔다”며 “인권위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는 게 가장 큰 소명”이라고 말했다.
시민들은 인권위 앨라이 부스에 포스트잇으로 “안창호 위원장 물러나라” “혐오주의자 인권위원장은 필요 없다” “내년엔 공식 부스를 차리라”는 등 의견을 냈다.
부스 중에는 ‘청소년 퀴어 단체’도 많았다. 시민단체 ‘노동·정치·사람’에서 운영하는 성소수자 배움터 무지개 교실에서 활동하는 김민지씨(23)는 “자퇴한 청소년 퀴어가 있다면 공부하러 오라”고 외치고 다녔다. 김씨는 “학교에서 배제되는 등 이유로 자퇴하는 퀴어가 많다”며 “무지개 교실은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강의, 자습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마당극 민중의 부활’의 부스에서는 총 40여 팀이 혼인·생활동반자신고서를 썼다. 생활동반자신고서를 낸 김은지씨(29)와 지구(24·활동명)는 “법적으로 효력은 없지만 신기하다”며 “무엇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됐다”고 말했다. 2023년 성인 두 사람이 상호 합의에 따라 일상생활과 가사 등을 공유하며 서로 돌보는 관계를 ‘생활 동반자관계’로 정의하고, 가족과 동등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의 생활 동반자법이 발의됐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지구씨는 최근 갑자기 아파서 응급실을 가야 했다. 두 사람은 이미 같이 살고 있지만 김씨가 ‘보호자’가 되지는 못했다. 지구씨는 “생활동반자법, 동성혼 합법화가 ‘시급한 일이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응급실에 가야하는데 보호자가 없을 수 있는 상황이 어떻게 시급하지 않을 수 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도 “죽을 때 애인이 ‘보호자’가 아니라서 들어오지 못하고, 마지막 말도 전달하지 못한다는 상상을 하면 끔찍하다”며 “생활동반자법이 빨리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퀴퍼 참가자들은 새 정부에 한목소리로 ‘차별금지법 제정’도 요구했다. 대학생 박준형씨(21)는 “차별금지법이 우리에게는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라며 “성소수자를 포함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모씨(37)도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에서 성소수자가 빠지지 않아서, 소수자들에게 힘을 줬던 적이 있어서 명문화된 법이 생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약 20년 전부터 제정 운동을 하는 것으로 아는데, 이제는 제정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강한들 기자 handle@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