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레플리카 아파트 입구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불이 선명한데도 한 어르신이 건널목을 건너기 시작했다. 통행량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서 쌩쌩 다니는 차들이 적잖은 길이었다. 경적을 살짝 울려 조심하시라, 신호를 보냈다. 돌아온 반응은 싸늘했다. 삿대질은 없었지만, 입으로는 분명 ‘XX놈’이라고 욕을 하고 있었다. 어르신은 ‘걱정마라, 내가 다 알아서 한다’는 의도였겠지만,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순간 다시 깨달았다. 선한 의도가 모두 선한 결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190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작곡가 프란츠 레하르의 ‘유쾌한 미망인’은 오페레타 열풍의 한 축을 담당한 작품이다. 오페라보다는 가벼운, 뮤지컬보다는 클래식한 오페레타는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에서 인기였는데, 프란츠 레하르는 이 작품으로 부와 명성을 얻었다.
한나는 가상의 나라 폰테베드로의 부유한 은행가와 결혼했지만,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파리에 거주하는 한나에게 숱한 남자들의 구애가 이어졌다.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 파리 주재 대사는 어떻게든 한나의 결혼을 막아야만 했다. 마침 무도회가 열렸고 한나의 재산을 노리는 남자들의 애정 공세는 그야말로 거셌다. 한나는 ‘요즘 돈 많은 과부가 특히 인기가 있다’는 말로 남자들의 행동을 비꼰다. 비꼰다고 돈에 환장한 남자들의 욕망이 사라지겠는가. 한나의 더 센 한 방. ‘재혼하면 내 상속 재산은 모두 사라진다. 남편 유서에 그렇게 적혀 있다.’ 더 이상 한나에게 집적대는 남자는 없었다.
그때 나타난 한 사람. 결혼 전 한나의 정인(情人)이던 다닐로였다. 재산 때문에 다시 한나 앞을 얼쩡거리는 것은 아닌가, 의심받기 싫었던 다닐로는 ‘가난한 한나라도 사랑하겠노라’ 다짐하며 청혼한다. 한나가 유쾌하게 좌중을 향해 말한다. 나는 상속 재산을 잃겠지만, 새 남편의 재산이 될 거라고. 꽤나 방탕한 사람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다닐로의 선의, 즉 사랑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사랑의 결실과 함께 재산도 지켰으니 나름 선한 결과를 맺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사족 하나. 미망인(未亡人)이라는 말은 고상해 보이지만 ‘아직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니, 적절한 단어는 ‘남편이 죽어서 홀로 된 여자’인 과부(寡婦)가 아닐까 싶다.
윤성희 작가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 수록된 단편 ‘자장가’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의’를 가진 존재가 분명한 엄마가 등장한다. 작품의 화자는 교통사고로 죽은 ‘나’다. 상심 끝에 몸져눕지는 않을까 저어했지만, 엄마는 미역국을 끓이고 잡채를 만들고, 매운 갈비찜까지 곁들여 ‘나’의 생일상을 차렸다. 음식을 반찬통에 담고 파김치까지 챙겨 꽈배기분식 이모에게 달려가 여행 계획도 나눈다. ‘나’는 떠났는데, 엄마의 일상은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생각해보니 엄마와 ‘나’는 “즐거울 때는 같이 웃었지만 슬플 때는 서로 모른 척”하는 사이였다. 딸의 생일상을 차리고, 친구와 소주를 마시며 여행 이야기를 한 건, 기실 슬픔을 이겨내려는 몸부림이었다. 선한 의도의 결과가 항상 선하다고 말할 수 없는 세태지만, 어쩌면 세상의 모든 엄마는, 새 생명을 품은 그때부터 ‘선한 의도’를 품은, 하여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선한 결과) 존재들 아니겠는가.
오늘 퇴근길에도 아파트 입구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릴 것이다. 그때 그 어르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또 빨간불에 길을 건널지 모른다. 그때도 가볍게 경적을 울려줄 생각이다. 그이가 욕을 내뱉더라도, 내 선한 의도만큼은 변함없을 테니 말이다.
12·3 불법 계엄 이후 국가정보원 조직을 동원해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의 계엄 관련 증언 신빙성을 훼손하려한 혐의를 받는 조태용 전 국정원장이 28일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 조은석 내란 특별검사는 조 전 원장이 국정원을 정치에 이용함으로써 사회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고 평가했다.
특검은 이날 국정원법 위반, 직무유기, 위증, 증거인멸, 허위공문서작성 및 행사, 국회증언감정법 위반 혐의를 받는 조 전 원장을 구속 기소했다.
홍 전 차장은 지난 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에서 ‘윤 전 대통령이 정치인 체포 등을 지시했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조 전 차장은 이런 홍 전 차장의 증언을 무력화하려고 탄핵을 반대하는 국민의힘 의원에게 ‘계엄 당일 홍 전 차장의 행적이 담긴 국정원 폐쇄회로(CC)TV 영상’을 반출한 혐의(국정원법 위반)를 받는다. 조 전 원장은 이 과정에서 비서실 직원을 시켜 국민의힘 의원들과 사전에 긴밀하게 교감했고, CCTV 반출 관련해 허위로 내부 결재 서류도 작성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검은 이런 행위가 국정원장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명시한 국정원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봤다. 박지영 특검보는 “국정원장의 정치 관여로 우리 사회 갈등이 증폭되고 (사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고 말했다.
조 전 원장은 계엄 선포 당일인 지난해 12월3일, 홍 전 차장에게서 정치인 체포 지시에 대해 보고받고도 이를 묵살하고 국회에 보고하지 않은 혐의, 불법 계엄 선포 전 미리 대통령실에 불려가 계엄 선포 사실을 전달받았음에도 이 역시 국회에 보고하지 않은 혐의(직무유기)도 받는다. 국정원법 15조는 ‘국정원장은 국가 안전보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발생한 경우 지체 없이 대통령 및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해야 한다’고 정한다. 조 원장은 이 규정을 지키지 않아 직무유기 혐의가 적용된 첫 사례다.
특검은 이 밖에도 조 전 원장이 윤 전 대통령 탄핵 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윤 전 대통령 등으로부터 계엄 관련 지시는 물론 문건을 받은 적 없다’는 취지로 허위 증언(위증)했으며, 국회의 계엄 관련 국정조사에서도 비슷한 취지로 허위 증언을 하거나 허위 답변서를 작성해 제출(허위공문서작성 및 행사)했다고 판단했다. 그는 계엄 해제 이틀 뒤 박종준 전 대통령 경호처장과 공모해 윤 전 대통령 등의 비화폰 정보를 삭제(증거인멸)한 것으로도 조사됐다.
특검은 이 같은 혐의로 지난 7일 조 전 원장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은 12일 영장을 발부했다. 특검은 조 전 원장 신병을 확보한 상태에서 두 차례 추가 소환 조사를 거쳐 그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 등을 보강한 뒤 이날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겼다.
박 특검보는 “조 전 원장은 방첩사의 정치인 체포 활동 지원하라는 윤 전 대통령 지시를 보고받아 국가 안전보장에 중대한 영향 미치는 폭동 행위가 미치고 있음을 인지하고도 국정원장으로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며 “그런 사실이 드러나자 자신의 직속 부하를 거짓말쟁이로 치부하면서 국정원장 지위를 특정 정파 이익을 대변하는 데 활용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