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을 각오를 했다”···국회의장이 담 넘던 그날 밤, 경호대장이 전화도 안 받은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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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210.♡.151.76) | 작성일 | 25-11-28 22: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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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만난 김성록 서울경찰청 국회경비대 국회의장경호대장(경감)은 1년 전 일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는 지난해 12·3 불법계엄 사태 때 우원식 의장을 수행하며 함께 국회 담장을 넘었다. 우 의장이 담장을 넘는 역사적인 사진도 찍었다. 이후 여러 차례 인터뷰를 사양하던 김 경감은 ‘그날 당신이 보고 겪은 장면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는 말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불법계엄을 선포하기 전까지는 지난해 12월3일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 경감은 우 의장이 국회 김장행사,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과 만찬 등을 하는 내내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우 의장은 밤 9시가 되어서야 서울 용산구 한남동 국회의장 관저에 도착했다. 다른 직원들은 퇴근하고 김 경감은 경호대 당직근무자와 함께 관저에 남았다. 다음날에 우 의장이 지방을 가야 해 김 경감도 경호동에서 자기로 했다. 김 경감은 씻고 난 뒤 잠자리에 들기 전 텔레비전을 켰다. 마침 윤 전 대통령의 담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가짜뉴스라고 생각했어요.” 김 경감이 부랴부랴 인터넷에도 접속해 보니 ‘계엄선포 속보’가 쏟아지고 있었다. ‘의장님께서 국회에 들어가시겠구나’ 생각한 김 경감은 다시 옷을 챙겨 입었다. 운동하던 당직자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하고 차를 몰아 국회로 향했다. 오후 10시38분쯤 관저를 출발해 약 15분 만에 국회 3문 앞에 도착했다. 평소였다면 아무 문제 없이 지날 수 있었던 문이 이미 막혀있었다. 옆의 4문도 경찰이 통제하기 시작했다. 김 경감은 ‘의장이 탄 차량이니 문을 열라’고 소리치는 대신 다른 통로를 찾았다. ‘우 의장이 계엄군의 1순위 체포 명단에 포함됐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이었지만 김 경감은 본능적으로 ‘의장의 위치가 노출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단 여기서 내리자.” 차가 들어설 출입문을 찾을 수 없자 우 의장이 김 경감에게 말했다. 김 경감은 3문과 4문 사이 어둑한 길가에 우 의장과 함께 내렸다. 국회 담장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발을 디딜 곳이 마땅치 않았다. 가로등이 나무에 가려 주변도 너무 어두웠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국회 식물원 앞에 난 철문이었다. 담장보다 조금 낮은 데다가 발 디딜 곳도 있었다. 김 경감이 먼저 철문을 넘어 주변을 살폈다. 우 의장도 이어 철문을 넘었다. 김 경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며 휴대전화로 그 모습을 찍었다. 김 경감이 찍은 사진은 12·3 불법계엄을 상징하는 사진 중 하나로 역사에 남았다. 김 경감은 우 의장과 함께 국회 본청으로 향했다. 그러나 어두운 길을 따라가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다시 돌아가려던 순간 식물원 옆 어린이집 담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우선 몸을 피하고 보니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담장을 넘고 있었다. 담장을 넘은 사람은 군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이었다. 김 경감과 우 의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본청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국회 본청에 도착해보니 내부는 고요했다. 의장실로 향하는 복도는 조명이 꺼져 어두웠다. 김 경감은 “매일 수십번 지나다니는 길인데 알 수 없는 터널을 지나는 것 같았다”고 그때를 돌아봤다. 국회의장 비서관과 국회 사무처 직원이 하나둘 국회로 모여들었다. 김 경감은 혹시라도 우 의장의 위치가 경찰이나 계엄군 등에게 파악될까 걱정돼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 밖을 살펴보니 멀리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김 경감은 “그때 정말 죽을 각오를 했다”고 말했다. 마음이 약해질까 가족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국회의장을 찾는 군인들이 밀려들어 오면 어떻게 맞설지 생각했다. “ <서울의 봄>도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로 재미있게 봤었는데, 막상 실제 그 상황이 되니까 감정이 이입되더라고요.” 다행히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너무 늦지 않게 통과됐다. 김 경감은 ‘2차 계엄’을 걱정하며 우 의장 경호 임무를 이어갔다. 이후 집으로 퇴근할 때까지 나흘이 더 걸렸다. 김 경감은 인터뷰 말미에 “그날 밤 경호대상자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속 생각했다”며 “그때의 임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를 완수하는 것뿐”이었다고 말했다. “여러분께 평생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순재가 지난해 12월 31일 K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시청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남겼다. 평생 연기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그인 만큼 감사를 전하는 그의 말이 울림 있게 다가왔다. 이순재는 생전에 자신의 연기 철학을 담아낸 말들을 많이 남겼다. 그는 2016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연기란 오랜 시간 갈고 닦아 모양을 내야 하는, 완성할 수 없는 보석”이라고 했다. 이어 “배우라면 자신이 맡은 배역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며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지난해 제60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특별무대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연기가 쉽지 않다. 평생을 했는데도 아직 안 되고, 모자라는 데가 있다. 배우는 항상 새로운 역할에 대한 도전”이라며 “예술이란 영원한 미완성이다. 그래서 나는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한다”고 말했다. 다작한 배우로서 연기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자주 드러냈다. 이순재는 2018년 영화 <덕구>에 출연하면서 “별의별 종류의 영화에 다 출연해봤다. 주연도, 단역도, 악역도, 멜로 연기도 다 해봤다”면서 “배우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조건 작품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누구보다 책임감 강한 연기자였던 고인은 죽기 직전까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의지와 배우로서의 소명의식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2018년에는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해 “대사를 외울 수 있을 때까지는 연기하고 싶다. 매 작품이 유작이라는 생각으로 임한다”고 밝혔다. 2023년 같은 방송에 출연해서도 “내 소망은 무대에서 쓰러지는 것이다. 그게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4월 방영된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는 “조건이 허락된다면 가장 행복한 것은 공연을 하다 죽는 것이다. 무대에서 쓰러져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고 죽음에 대한 뜻을 밝혔다. 그는 2008년 모친상을 당한 뒤 연극 <라이프 인 더 씨어터> 무대에 오르면서 “관객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공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1년 한 배우의 드라마 중도 하차가 논란이 되자 “어떤 이유에서든지 현장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 우리의 조건이다. 배우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현장을 지켜야 한다”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원로 배우로서 드라마 업계의 잘못된 관행과 상업주의를 꼬집는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이순재는 2010년 MBC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 종방연에서 “작업 과정은 지옥이었다. 젊은 친구들이 생사를 걸고 한 작품”이라며 “이제는 완전한 사전제작제로 들어가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듬해 MBC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가 이른바 ‘쪽대본’ 논란에 휩싸이자 “어느 나라가 이렇게 드라마를 만드느냐”며 “외주제작을 의뢰할 때 적어도 열흘 전에 대본을 넘겨 검사할 시간을 달라는 계약을 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순재는 후배 연기자들에게 엄격한 선배이자 멘토였다. 그는 “배우들이 한 단계 뚫고 더 올라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다”며 “만날 깔끔하게 멋 내는 게 배우가 아니라 역할을 위해 항상 변신하는 게 배우”라고 강조했다. 드라마와 영화, 시트콤 등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했지만 가장 사랑한 것은 연극 무대였다. 그는 2016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연극 무대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며 “시작을 여기서 했으니 여기에 대한 향수를 늘 갖고 있다”며 “무대는 배우의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용인성범죄전문변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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