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종전협상을 이끄는 미국 정부의 스티브 윗코프 중동특사가 러시아 고위 인사와 지난달 통화한 내용이 유출돼 파장이 일고 있다. 윗코프 특사는 당시 통화에서 종전협상을 두고 러시아 입장에 동조하는 발언을 이어갔는데, 러시아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28개 조항’ 평화협정 초안이 마련된 데 단초가 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블룸버그통신은 26일(현지시간) 윗코프 특사와 유리 우샤코프 크렘린궁 외교정책 보좌관이 지난달 14일 나눈 약 5분간의 통화 내용을 공개했다. 윗코프 특사는 당시 통화에서 조만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백악관에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리며, 그 전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통화할 것을 제안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평화주의자로 존경한다고 말하면 좋을 것”이라는 조언도 건넸다.
윗코프 특사는 이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를 통제하고 별도로 ‘영토 교환’하는 방안도 언급했다. 그는 우샤코프 보좌관에게 “나는 평화협정을 성사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 도네츠크와 아마도 어느 땅의 교환”이라고 했다. 이어 “가자지구에서처럼 20개 조항의 평화 구상을 내놓는 방법도 생각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이런 대화를 두고 “우크라이나에 받아들이라고 압박한 28개 조항 평화협정안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블룸버그는 짚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2시간30분간 통화는 젤렌스키 대통령 방미 하루 전인 지난달 16일 이뤄졌고,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거친 욕설과 훈계를 퍼부으며 회담을 마쳤다. 러시아에 치우친 내용으로 논란이 된 ‘28개 조항’ 평화협정 초안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지난달 24일부터 사흘간 키릴 드미트리예프 러시아 경제특사가 미국 마이애미에 머물며 윗코프 특사 등과 시간을 보냈을 당시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28개 조항’ 평화협정 초안이 트럼프 정부에 제안된 러시아 측 초안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17일 젤렌스키 대통령의 백악관 방문 직후 러시아가 비공식 서한 형태로 종전 요구사항을 트럼프 정부에 전했으며, 여기에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영토 포기 등 조건이 담겨 있었다는 것이다.
통화 내용이 공개되자 미 공화당 내에선 윗코프를 해임해야 한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담당자가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이라며 “표준 협상 방식”이라고 윗코프를 옹호했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이스라엘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아브라함 협정’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액시오스는 25일(현지시간) 빈살만 왕세자가 지난 18일 백악관에서 이뤄진 양국 정상 회담에서 이같은 입장을 드러내 한때 분위기에 긴장감이 돌았다고 전했다.
아브라함 협정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 국교를 정상화하는 협정으로 2020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수단, 모로코 등이 가입했다. 이는 트럼프 1기 행정부 중동 외교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지난 6일 카자흐스탄이 협정에 추가로 가입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회동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가 아브라함 협정에 가입하도록 강하게 압박했으나 빈살만 왕세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브라함 협정을 포함한 중동 정세에 관한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다. 하지만 빈살만 왕세자는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고 싶지만, 가자지구 전쟁 이후 사우디 내 여론이 이스라엘에 관해 매우 적대적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빈살만 왕세자는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는 ‘두 국가 해법’이 선행되면 아브라함 협정에 가입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두 국가 해법의 인정이 아브라함 협정 가입의 선행 조건이라고 거듭 강조해 왔던 사우디의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한 미국 관리는 액시오스에 “빈살만 왕세자는 (이스라엘과 국교의) 정상화를 거부한 적이 없다”며 “나중에 정상화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말했다.
한 미국 고위 관리는 이스라엘 채널 12에 “대화는 정중하게 진행됐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빈살만 왕세자의 거부에 관해 실망했으며 화가 났다”고 말했다. 한 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가 아브라함 협정에 가입하기를 정말 원하며 빈살만 왕세자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며 “하지만 빈살만 왕세자는 강인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아브라함 협정 확대를 위한 적극적인 외교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10일 아메드 알샤라 시리아 임시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한 것도 시리아를 아브라함 협정에 가입시키기 위한 외교적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알샤라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 이후 “지금 당장은 아브라함 협정에 가입하기 위한 협상을 하지 않을 테지만, 아마도 트럼프 행정부가 그러한 협상이 가능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백악관 관계자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이 소멸하고 가자지구 전쟁이 종식된 지금, 트럼프 대통령은 중동의 모든 국가가 역내 평화를 진전시킬 아브라함 협정에 동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