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지원사 한·미 양국이 지난 14일 총 3500억달러(약 507조원)에 달하는 ‘전략적 투자에 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면서 한·미 관세협상의 ‘큰 산’을 넘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본격적인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짚었다. ‘각론’ 수준의 구체적인 협의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6일 한·미 정부가 공개한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 등을 종합하면, 한국은 미국에 조선·에너지·반도체·의약품·핵심광물·인공지능(AI)·양자컴퓨팅 등 주요 산업 분야에 대해 3500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하는 조건으로, 15% 상호관세와 일부 품목 관세 인하를 약속받았다.
이에 미국은 한국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 원목과 목재 제품 관세는 25%에서 15%로 낮추고, 의약품 관세는 15% 이하로 조율한다. 또 복제의약품과 미국 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천연자원 등에 대해선 추가 관세를 없애고, 항공기와 부품은 관세를 철폐했다.
자동차 관세 인하 시점은 MOU 이행 기금 조성 관련 법안이 제출되는 달의 1일로 하기로 해, 이달 1일로 소급 적용될 가능성이 유력하다.
다만 철강·알루미늄 분야엔 여전히 ‘비상등’이 켜져 있다. 철강·알루미늄과 파생상품은 지난 2월부터 25%의 관세를 부과받았고, 지난 6월에는 여기에 25%를 추가해 총 50%의 관세율을 적용받았지만 이번 관세협상에서 제외됐다.
철강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유럽은 한국 철강업이 그간 공략하던 고수익 시장이었는데 지금은 미국 수출량이 많이 줄어드는 추세이고 앞으로 더 감소할 것”이라며 “현실적으로 당장 철강 품목 관세협상이 어려운 만큼 국회에 계류 중인 ‘K스틸법’ 등 지원책이라도 조속히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K스틸법은 글로벌 철강 수요 둔화, 미국의 고율 관세 유지 등 복합 위기에 처한 국내 철강 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특별법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결과가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투자의 구체적인 이행 과정에 참여할 한국의 권한 수준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양국은 프로젝트 벤더·공급업체로 한국 업체를 우선 선정하고 프로젝트마다 한국 프로젝트 매니저를 설정하기로 합의했는데, 한국 업체와 프로젝트 매니저가 단순 하도급이나 조언자 역할에 그쳐선 안 된다는 취지다.
유명희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1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밴플리트 정책 포럼’에서 “공동 팩트시트는 최종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길고 불확실한 과정의 시작에 불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양국 정부가 모두에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는 구체적인 투자 프로젝트를 어떻게 선정, 관리하느냐에 많은 게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 분야를 예의주시했다. 다른 전략 품목의 경우 15% 또는 최혜국대우(MFN) 등이 명시돼 있지만, 반도체는 대만을 염두에 두고 ‘한국과 무역 규모가 동등하거나 더 큰 국가에 비해 불리하지 않은 조건을 제공한다’고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만이 유럽연합(EU·15%)보다 높은 관세를 부과받으면 한국 또한 고율 관세를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비관세 장벽 관련 협의 내용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도 나온다.
외교부 2차관을 지낸 이태호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현재 자동차 안전기준과 식품·농산물 규제 등 큰 의제만 설정돼 있고 구체적으로 장벽을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해 언급이 없는 상황”이라며 “우리에겐 정치적으로 예민한 부분이고 향후 미국이 압박할 수 있는 지점인 만큼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소말리아 내전에서 가족과 함께 탈출해 난민으로 살아남은 복서 람라 알리(33)가 자신이 떠났던 길을 다시 되짚었다. 영국에서 국가대표 복서로 성장하고, 소말리아 최초 올림픽 복싱 대표가 된 그는 이제 UN아동기금(UNICEF) 친선대사로서 난민과 소녀들의 교육·기회 확대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CNN이 최근 전했다.
알리는 내전으로 오빠를 잃은 뒤 가족과 함께 소말리아를 떠났다. 케냐에서 약 1년간 난민 생활을 한 뒤 영국 런던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10대 시절 우연히 시작한 복싱은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그는 CNN을 통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다. 복싱은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공간이었다”며 “몸이 변하고 건강해지면서 자신감이 생겼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 시작한 복싱은 결국 국가 대표로 이어졌다. 영국 내셔널 타이틀을 따냈고 2019년 아프리카 존 페더급 챔피언에 오른 그는 2020 도쿄올림픽에서 소말리아 최초 올림픽 복싱 국가대표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알리는 지난 9월 UNICEF와 덴마크난민위원회(DRC)와 함께 케냐 나이로비와 다답 난민캠프를 찾았다. 그가 만난 이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미래를 포기하지 않은 소녀들, 교육 기회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교사들, 생계를 위해 폐기물 재활용 작업을 이어가는 난민 여성들이었다. 그는 “여기서 다른 삶을 꿈꾸는 이 소녀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며 “내가 여기서 계속 자랐다면, 아마 나도 이들 중 한 명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난민 여성 200여 명과 함께 플라스틱·종이를 분류하며 작업을 도왔다. 이 프로그램은 여성들에게 안전한 일자리를 제공하고, 그들의 자녀에게는 보육·비정규 교육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생각으로만 그리던 장면을 눈으로 보니 충격적이었다”며 “우리 엄마도 이럴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다답 캠프 내 ‘필름에이드 케냐’에서는 난민 청소년들이 영화와 스토리텔링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알리는 이곳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학생들과 나눴고, 소녀들은 의사·간호사·심리치료사 등 다양한 꿈을 이야기했다. 한 15세 소녀는 “처음 카메라를 만졌을 때 무서웠지만 지금은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알리는 “단지 카메라 하나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희망을 느꼈다”고 했다.
알리는 2018년부터 UNICEF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난민과 소녀들의 교육, 여성의 권익 확대를 위한 현장에 꾸준히 참여해 왔다. 그는 또 여성들이 안전하게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람라 알리 시스터즈 클럽’을 설립했다. 학대 피해 여성, 여성 전용 공간을 원하는 무슬림 여성, 저소득층 여성 등 누구나 무료로 복싱과 피트니스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작은 수업 하나로 시작된 클럽은 현재 런던·뉴욕·플로리다 등으로 확장됐다. 그는 “링 위에서 이룬 성과보다, 링 밖에서 제가 만드는 변화가 더 기억되길 바란다”며 “타인을 위해 하는 일이 우리가 이 세상에 지불해야 할 ‘존재 임대료(The rent you pay on this Earth)’”라고 말했다.
▼ 김세훈 기자 shkim@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