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지구인구직 들판이 순식간에 속살을 드러낸다. 추수 마친 검은 논바닥을 홑이불처럼 덮었던 볏짚은 며칠 버티지 못하고 공룡알로 변태되며 싹쓸이당했다. 느릿하게 보이던 수확 작업도 거의 마무리되고 사람의 손끝이 필요한 갈무리가 남았다. 털고 때리고 모으고 쟁이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겨울 휴식이다. 보통은 두 달 남짓, 김장 마치고 이듬해 입춘까지는 농한기를 보낸다. 옛날 같으면 사랑방에서 새끼 꼬고 화로에 고구마 꽂아두던 그때다. 새끼 안 꼬아도 된다고 해서 놀거나 자빠져 있기를 즐기는 농민은 없다. 과일나무 가지치기도 해야 하고, 화목난로를 때는 집은 쉴 새 없이 나무도 마련해야 한다. 양파 마늘밭도 손길을 부른다.
이민 가듯 서울을 떠난 뒤 열다섯 번째 맞는 겨울이다. 매년 겨울이면 프로야구 선수들 동계훈련하듯이 몸도 만들고 체력도 키워서 봄을 시작하겠다는 포부를 품는다. 많은 시간을 채웠던 노동을 운동으로 교체하려는 계획도 세운다. 메모지를 붙이며 다짐을 상징하고, 화엄사 계곡을 탐색하기도 하고, 읽고 싶던 책도 주문해 쌓아놓곤 한다.
아쉽게도 국민학교 1학년 방학 이후 모든 계획표는 나와 궁합이 안 맞았다. 계획을 짜는 것까지만 좋아했지 싶다. 올겨울도 한결같이 계획과 각오를 반복하고자 한다. 나이 60줄에 들어서며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일 치를 수 있다는 충고를 듣는다. 너무 안 변해서 아직도 이 모양이지만.
일단 그 흔한 ‘디지털 디톡스’를 해보자. 미국 통계에 따르면 스마트폰을 하루에 평균 2617번 터치하면서 화면을 들여다보는 데만 2시간30분을 소비한다고 한다. 휴대전화, TV, 오디오, 컴퓨터 등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며 보내는 시간은 평균 11시간6분이란다. 하루의 절반에 가깝고 깨있는 시간의 3분의 2를 그렇게 쓰고 있다. 미국 사람들 얘기로 치부할 게 아니다. 우리나라가 덜하진 않을 게 뻔하다. 서너 가지 SNS에서 울려대는 신호음에 하던 일도 멈추고 반응한다. 참으로 충성스러운 호구들이다. 얼마 전 모든 알람을 껐고 세상이 조용해졌다. 폰 대신 책이다.
그다음으로는 줄이기 위한 노력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면 저장강박증이 있는 미니멀리스트에 가깝다. 의지는 명확하나 증세가 좀 더 심한 탓에 뜻대로 살지 못하는 편이다. 게다가 필요한 것 외에는 소비를 지양하고 필요하더라도 두세 번 더 생각한 뒤 구입하는데 대부분 ‘필요’가 이기는 쪽이다. 구입 후 1년간 포장을 뜯지 않은 것도 있고, 같은 것을 두 번 사는 경우도 있다. 별수 없다. 생필품을 제외한 신제품 구매를 일시정지하기로 한다. 뭔가 사고 싶어 손이 떨리기 전까지 한시적이다.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따뜻한 책을 선물받았다. 어려운 곳에서 아픈 이들을 치료하는 분들의 이야기였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쌀밖에 없어요” 말씀드리니 쌀이 필요한 곳을 연결해주셨다. 농사지으면서 농산물로 기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생겼다. 작년보다 조금 늘어난 수확물을 나눌 계획이다. 쌀이 부족한 곳을 찾고 있다. 겨울 동안 추운 이유가 기온만이 아닌 사람들을 찾아보려 한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했다. 덜어내고 줄이며 살아가라는 말일 터. 나누고 비우는 겨울이 기다리면 좋겠다.
대전 오월드에서 지내던 백두산호랑이 ‘미령’이가 국립백두대간수목원 호랑이숲으로 터전을 옮겼다.
산림청 산하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은 지난 9월 대전 오월드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지난달 22일 이주를 완료했다고 13일 밝혔다. ‘아름답고 영리한 호랑이’라는 뜻의 미령은 지난 2021년 5월 태어난 암컷 백두산호랑이다.
미령은 도착 직후 기초 건강검진을 마쳤으며, 현재는 내실에서 환경 적응을 진행 중이다. 수목원 측은 미령의 안정정도와 내부 상황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뒤 일반 공개 일정을 추후 안내할 계획이다.
축구장 5.4개 규모(3.8㏊)의 국립백두대간수목원 호랑이숲은 백두산호랑이의 자연 서식지에 가깝게 조성된 데다 국내 최고 수준의 사육·관리 시설을 갖추고 있다.
미령이 합류하면서 현재 호랑이숲에는 우리(수컷, 14세), 한(수컷, 11세)·도(암컷, 11세) 남매, 태범(수컷, 5세)·무궁(암컷, 5세) 남매 등 총 5마리에 이어 총 6마리의 호랑이가 생활하게 된다.
이규명 국립백두대간수목원장은 “국제적 멸종위기종인 백두산호랑이를 수목원의 새 식구로 맞이할 수 있도록 협조해 준 대전 오월드에 감사드린다”며 “앞으로도 모든 백두산호랑이들이 건강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더니, 하물며 원래 내 땅이 사촌 땅으로 둔갑한다면 그 심정이 어떨까. 시초와 내력이 여전히 미궁 속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벨기에 감자튀김’ 이야기다.
추워지는 요즘 유난히 더 당기는 고소한 프렌치프라이. ‘프렌치(프랑스의)’라는 이름부터 벨기에 사람들은 억울하리라.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17세기 말 벨기에 남부의 뫼즈(Meuse)강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평소 강에서 잡은 작은 생선을 튀겨 먹었는데, 겨울에 강이 얼어 생선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대신 감자를 생선 모양으로 잘라 튀겨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일화가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흔히 아는 패스트푸드점의 감자튀김보다 벨기에식 감자튀김(friet)이 훨씬 두껍고 묵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름에서 언급되는 프랑스 측 입장은 다르다. 자국 요리사들이 18세기 파리에서 감자튀김을 대중화시켰으니, 감자튀김 종주국은 당연히 프랑스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여기에 제3의 국가 미국이 등장한다. ‘프렌치프라이’라는 명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의 프랑스어권 지역에 주둔하던 미군들이 이곳 감자튀김 맛에 반해 귀국 후 고향에서 만들어 먹기 시작하면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프랑스식(French) 튀김(fries)’이라는 이름이 틀린 건 아닐지라도 진짜 프랑스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프랑스어권 국가 사람들에게서 출발한 건지 애초에 명확한 족보를 명시해줬다면 참 좋았으련만. 물론 미국인들이 굳이 ‘프랑스식’이라 출처를 남겨준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제3자의 눈에도 어딘가 첫 단추부터 꼬여버린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훗날 이 음식이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잘나갈 줄 알았을까. 벨기에 입장에서는 가만히 앉아 코 푼 격의 프랑스가 얄밉고, 프랑스로서는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을 그 원조 타령을 여전히 이어가는 벨기에인들이 그저 답답할 테다.
감자튀김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은 한국의 ‘할머니 보쌈’ 원조 찾기만큼 뜨겁지만, 뚜렷한 결론 없이 평범한 식탁 위에서 계속될 뿐이다. 어느 날 고속도로에서 무례하게 끼어들어 달려가는 차를 보고 “주문한 감자튀김 나왔나 보네?” 하고 중얼대던 남편의 코멘트에 피식 웃은 적이 있다. 무던한 일상조차 감자튀김으로 연결하는 그들의 무조건적 사랑을 마주할 때면, 괜스레 마음 한쪽이 아릿해질 뿐. 튀기는 기름의 종류와 온도, 감자의 품종과 두께, 곁들이는 소스, 먹는 그릇과 빈도까지… 도대체 이 감자튀김이 뭐라고, 나이와 성별을 넘나드는 일상 속 ‘감튀’ 토론은, 갓 튀긴 감자가 식을까봐(?) 과속하는 그 차와 달리 끝끝내 식을 줄을 모른다.
포장마차 앞을 스칠 때 차가운 바람 속 튀김 냄새에 발길이 멈추던 기억처럼, 늦가을 어스름한 벨기에 골목길에서 풍겨오는 감자튀김 냄새의 유혹도 피할 재간이 없다. 맛집 탐방에 열을 올리는 한국인을 이해할 수 없다던 내 벨기에 친구들이 감자튀김 하나에 긴 줄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이렇게 기도하듯 조용히 속삭여주고 싶다.
“그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감튀의 원조는 너희 벨기에인들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