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지구인 날개를 펼치면 아름다운 세상을 만날 수 있는데, 왜 날지 않냐고 아무리 말해줘도 도무지 날고 싶지 않은 파랑새가 있다. 슬픔이 너무 깊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파랑새는 그저 홀로 숲의 그림자 속에서 침잠할 때가 가장 편안하다.
어느 날 수풀 사이를 걷다 사냥꾼에게 붙잡힌 파랑새는 인간들의 눈요기가 되다 버려진다. 도시의 뒷골목에 쓰러져 있는 그에게 다가온 건 발목에 쇠사슬을 찬 플라밍고. 플라밍고는 파랑새를 데리고 도시에서 탈출한다. 다시 숲으로 돌아온 파랑새는 예전처럼 외롭지 않다. 플라밍고는 파랑새가 날지 않는다고 다그치지 않는다. 둘은 함께 걷고, 열매를 따먹고 서로에게 기대어 잠이 든다.
여러 계절이 지나고 플라밍고의 몸이 가을처럼 바스락거린다. 털이 듬성듬성 빠지고 움직이지 못한다. 파랑새는 직감한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플라밍고는 세상을 떠난다. 그를 옥죄던 쇠사슬만 남긴 채. 플라밍고는 이제 자유로워졌을까. 파랑새는 플라밍고가 그리울 때면 부리로 그가 견디었을 쇠사슬의 무게를 재어본다. 플라밍고와의 시간을 떠올리며 시간을 견디다 보니 다시 봄이 왔다. 파랑새는 바람꽃을 물어와 플라밍고가 있던 자리에 놓는다. 때마침 바람이 불고… 파랑새는 파란 하늘 속으로 날아오른다. 하얀 구름 저 위로 높이, 아주 높이.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어떤 슬픔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 같다는 것을. 이유 없이 저무는 마음을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감당하기만 한다는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사실은 내 안의 어떤 것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을.
홀로 밤하늘을 바라보던 파랑새에서 시작된 책은 플라밍고와 함께 일출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닫힌다. 파랑새 곁에 묵묵히 있어준 플라밍고가 결국 파랑새를 날게 했다. 누군가에게 위로받은 마음은 그렇게 용기가 된다. 그리고 믿는다. 파랑새가 다시 누군가의 위로가 되어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결국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을.
“사람들 대학 이름만으로 평가내 모습 내 생각 찾고 싶었죠”
“학벌주의 사회 안 바뀌겠지만수능이 만든 세계 벗어나려 해”
한국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은 일종의 ‘명절’이다. 거리 곳곳엔 수험생을 응원하는 현수막이 걸리고 당일엔 비행기 이착륙까지 잠시 멈춘다. 온 나라가 수험생에 집중하는 이날을 조금 다르게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학벌중심사회에 저항해온 시민단체 ‘투명가방끈’ 활동가들을 지난 10일 만났다. 이들은 ‘수능 100일’ 대신 ‘저항 100일’을 세며 ‘수능 다음의 세계’를 상상해왔다.
투명가방끈은 2011년 청소년 18명의 ‘대학입시거부선언’에서 출발했다. 대학 진학을 거부한 이들이 모여 “우리는 ‘낙오자’가 아닌 ‘거부자’”라고 선언하고 ‘가방끈’으로도 불리는 학벌주의가 사라지길 바라며 투명가방끈을 결성했다. 이들에게 수능은 ‘미래로 가는 통로’가 아닌 ‘미래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청소년의 삶이 대입이란 획일적 목표에 휩쓸려가는 현실을 비판하며 매년 11월 대학에 가지 않은, 혹은 가지 못한 청소년들의 존재를 드러내왔다.
올해 수능을 앞두고 투명가방끈은 ‘저항일력’을 만들었다. 수능 100일 전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수능 100일을 세던 문화를 뒤집어 ‘수능 저항 100일’을 기록했다. “아무도 시험 때문에 고통받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는 시험 그 이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육에서 사다리는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함께 손잡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등 입시경쟁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쓴 문장들을 모아 기록했다.
문장들은 활동가 자신의 고백이기도 했다. 투명가방끈 결성부터 함께한 활동가 난다씨(활동명)는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단풍이 들고 꽃이 피는 세상을 두고 책상 앞에만 10시간씩 앉아 있는 답답함”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성적을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어른들의 말이었다. “너 그러다 지방대 간다” “나중에 커서 배추 장사나 한다” 등 점수로 ‘실패자’를 규정하는 말들이 싫어서 학교 밖으로 나왔다. 학교 안에서 ‘끈기 없는 학생’으로 평가받던 난다씨는 투명가방끈에서 활동한 지 10년이 넘었다.
공현씨(활동명)는 소위 ‘명문대’에 진학했다. 사람들은 오직 대학 이름으로만 자신을 평가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다른 곳에 있는데” 학벌로만 평가받는 현실이 재미없었던 그는 대학을 떠나 투명가방끈에 들어왔다. 공현씨는 자신을 ‘명문대 중퇴생’이 아닌 “웹소설 10개를 동시에 읽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웃었다.
연혜원씨는 대학원 연구 과정에서 “학벌주의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공업고교 학생들을 인터뷰한 혜원씨는 “공부를 못하는 애” “대학을 못 간 애”라는 낙인이 현장실습생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까지 정당화한다고 느꼈다. 대학원에서 출신학교 등으로 차별받는 자신의 모습이 그 학생들과 겹쳐 보였다. “불행이 닥치도록 설계된 세계가 수능이 만든 세계”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우리는 수능이 만든 세계에 살지 않는다”라는 구호를 손에 들었다.
‘수능 바깥의 세계’를 살기란 쉽지 않다. 난다씨는 “사람들이 학교를 그만둔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자주 묻는다”며 “‘저학력자’라서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못할 때 자책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무엇이 나를 후회하도록 만드는지’ 되묻고 싶다”며 “투명가방끈의 세계가 더 넓어져서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다’고 스스로 긍정할 수 있으면 한다”고 했다.
13일 수능이 치러진다. ‘저항 100일’의 끝에는 무엇이 올까. 혜원씨가 말했다. “먹물이 담긴 컵에 물 한 방울 넣는다고 먹물이 사라지진 않지만 그 한 방울이 쌓인다면 물이 투명해질 수 있잖아요. 한국사회 학벌주의도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100일 동안 매일 한 문장을 기록하듯 작은 저항들을 꾸준히 쌓는다면 우리 사회 ‘가방끈’도 투명해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