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분할 현존하는 신라 시대 돌로 쌓은 석축성 성벽 중 가장 빠른 시기의 양식으로 지어진 성벽이 대구 팔거산성에서 발견됐다.
국가유산청은 대구 북구청과 함께 실시 중인 대구 북구 팔거산성 3차 발굴조사에서 이런 성과가 나왔다고 13일 밝혔다.
국가지정문화유산 사적인 팔거산성은 함지산 정상부(해발 287.7m)에 위치한 테뫼식(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둘러싼 형태) 산성이다. 신라가 고구려·백제와 각축전을 벌이던 5세기쯤 신라의 수도 서라벌(현재 경주 일원)의 서쪽에 세운 군사요충지였다. 팔거산성은 대구를 동서로 흐르는 금호강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지점을 조망할 수 있게 지어져 달구벌(현재 대구)을 통해 서라벌로 진입하는 외적을 막고 남쪽 가야로의 진격을 도모할 수 있는 장소였다. 이곳에서는 2021년부터 발굴조사를 시작했으며, 1·2차 발굴조사에서는 물을 모으기 위해 설치한 목조 집수지, 글씨를 쓴 나무 조각인 목간 등이 발굴됐다.
지난해 9월 시작한 3차 발굴조사에서는 길이가 50m에 이르는 성벽이 추가로 발굴됐다. 이 성벽은 신라 때 먼저 지어진 성벽 위에 고려 때 개축된 성벽이 더해져 있다. 이 중 고려 때 개축된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으나 신라 때 먼저 쌓은 성벽은 형태가 남았다. 신라 때의 성벽은 산의 경사에 돌과 흙 무더기를 쌓는 방식으로 약 40도의 기울기를 줘 완만하게 하부를 쌓고, 이를 통해 평평해진 상부에 수직에 가까운 돌 성벽을 추가로 쌓는 식으로 지어졌다. 이런 건축 양식은 6세기부터 지어진 석축성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며, 5세기에 지어진 대구의 달성토성처럼 흙으로 만든 성의 건축 양식과 유사하다.
국가유산청은 이를 통해 팔거산성이 신라 석축성의 초기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 다른 신라의 석축성인 충북 보은 삼년산성이 470년에 지어졌다는 기록이 있지만, 건축 양식은 6세기 석축성과 비슷해 건축 시기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목조 집수지의 연대 추정을 통해 건축 시기가 480년 전후로 추정되는 팔거산성의 성벽은 발굴돼 육안으로 확인된 성벽 양식 중 가장 빠른 시기의 양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팔거산성의 신라 때 성벽 하부는 하부 2.3~2.7m 간격으로 서로 다른 성질의 돌이 쌓여 있기도 하다. 이번에 확인된 구획선만 14개인데, 성곽을 지을 때 동원된 집단들이 각자 구간을 나눠 일종의 ‘책임시공’을 하면서 구획이 눈에 띄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성벽에는 자색이암과 응회암 등 색이 조금씩 다른 돌들이 쓰였는데, 모두 함지산 곳곳에서 쉽게 캐낼 수 있는 것들이다.
국가유산청은 북구청과 추가 조사를 통해 발굴조사의 성과를 구체화할 계획이다.
대통령실 3실장이 한·미 관세·안보 협상의 후일담을 유튜브에 공개했다.
강훈식 비서실장과 김용범 정책실장, 위성락 안보실장은 지난 14일 밤 이재명 대통령의 유튜브 채널에 게시된 영상에서 한·미 협상이 타결됐던 지난달 29일 경주 한·미 정상회담 전후 상황을 소개했다.
‘케미폭발 대통령실 3실장’이란 제목의 영상은 양국의 관세·안보 협상 결과를 담은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발표된 뒤에 공개됐다. 양국이 정상회담 이후에도 세부 협의를 이어왔던 점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관세 협상을 담당했던 김 실장은 지난 8월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첫 한·미 정상회담 이후 미 측이 보내온 협상안에 대해 “기절초풍이라고 해야 할지, 진짜 말도 안 되는 안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아, 올해가 을사년(乙巳年)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일본과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도 을사년이었다는 점이 상기될 정도로, 시작부터 불평등 정도가 심했던 고난도 협상이었다는 취지로 보인다.
김 실장은 “완전 최악이었다”며 “미국 측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오는데 우리와 입장이 안 좁혀지니 엄청 화를 냈고,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도 전달됐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그는 “적어도 감내가 가능한 안을 위해 끝까지 사투했고 강경하게 마지막까지 대치했다”며 “‘더는 양보가 안 된다’는 우리의 선이 있었다”고 전했다.
위 실장은 “주요 플레이어들이 마지막 순간에 입장을 재고하고 상대를 배려해 서로가 물러섰다”며 협상이 극적 타결된 배경을 설명했다. 위 실장은 “결과적으로는 잘 됐다”며 “첫째로 대통령이 대처를 잘했고, 참모들도 지혜를 모아 대처 방안을 잘 궁리했다”고 평가했다.
강 실장은 협상 타결 직전 상황에 대해 “긴장감이 극대화돼있었고 이견은 좁혀지지 않은 상태였다”며 “끝나고 긴장이 탁 풀렸다”고 돌아봤다. 강 실장은 그간 협상 준비 상황과 관련해 “(한·미 간) 23차례나 장관급 회담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그는 “정책·안보실장은 주로 진척이 있는 것에 대해 (내부) 설득을 하는 편이었고, 제가 제일 완강한 입장에 서 있었다”며 “더 완강한 건 대통령이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