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니쉬플라이구매 충남 보령시는 오는 15~16일 천수만 농어촌테마공원(천북 굴단지) 일원에서 ‘2025 천북 굴축제’를 개최한다고 12일 밝혔다.
천북굴단지 상인회가 주최·주관하는 이번 축제에서는 천북굴의 매력을 살린 ‘굴비빔밥 퍼포먼스’와 시식행사가 진행된다.
관광객 노래자랑과 품바팀 공연, 초청가수 무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겨울 바다를 찾은 방문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예정이다.
천북 지역은 오랜 세월 품질 좋은 굴 산지로 명성을 이어왔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굴은 서해 갯벌의 풍부한 영양분을 머금고 자라며, 겨울철 찬바람을 맞아 단단하고 풍미가 깊어진다. 특히 11월부터 2월 사이가 제철로, 쫄깃한 식감과 진한 바다 향이 일품이다.
천북굴은 보령을 대표하는 ‘9미(味)’ 중 하나로 꼽히며, 미네랄·비타민·타우린이 풍부해 영양 가득한 겨울 보양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천북굴단지 상인회 관계자는 “이번 축제를 통해 천북굴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지역 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고 싶다”며 “축제 기간 위생과 청결 관리에 만전을 기해 방문객을 맞이하겠다”고 말했다.
예전에 한 섬유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합성섬유를 개발하는 일을 담당했었죠. 나일론, 폴리에스터 등으로 대표되는 합성섬유의 원리는 천연섬유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작은 분자들이 결합되어 커다란 고분자를 형성하고, 이 고분자들이 한 방향으로 배열하며 섬유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이죠. 다만 합성섬유는 이를 화학적 그리고 물리적 공정으로 진행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천연섬유로 실크라고도 불리는 견섬유가 있습니다. 나방의 일종인 누에가 입을 통해 기다랗게 배출한 물질인데요, 누에는 이 물질로 자신을 둘러싸 누에고치가 됩니다. 누에가 배출하는 이 물질의 정체는 기다란 단백질 고분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고분자들이 좁은 틈을 통해 배출되는 과정에서 한 방향으로 정렬하고 밀착되면 섬유의 형태가 됩니다.
합성섬유는 이러한 자연의 방식을 모방해 만들어집니다. 액상으로 만든 합성 고분자 물질을 노즐이라 불리는 아주 좁은 틈을 통해 강하게 밀어내고 응고시켜 섬유를 생산하죠. 그런데 누에를 모방한 것은 비단 합성섬유만은 아닙니다. 제면 공정도 이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밀가루를 반죽하면 글루텐 단백질이 형성되면서 탄력성이 생겨납니다. 이것을 칼로 썰어 그대로 면의 형태로 만들기도 하는데, 절면이라 부르는 방식이죠. 칼국수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반죽을 계속 치대고 늘이면서 면을 뽑을 수도 있는데, 흔히 납면 또는 수타면이라 불리는 방식입니다. 이 과정에서 탄력성은 더 강해집니다.
만약 더 쫄깃함을 원한다면 작은 구멍들이 뚫린 틀에 반죽을 넣고 강한 압력으로 밀어내면서 면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을 압면이라 부릅니다. 메밀 등 찰기가 부족한 재료로 면을 만들 때, 또는 쫄면처럼 극강의 쫄깃함을 구현하고자 할 때 이 방식을 사용합니다.
견섬유의 뛰어난 물성은 단백질 고분자들의 특이한 배열 때문입니다. 누에가 고분자를 배출하는 과정에서 길이 방향의 밀고 당기는 힘 그리고 횡 방향의 압력이 작용하면 고분자들이 일렬로 배열하면서 밀착되는데, 그러면 고분자들 사이의 결합이 활성화되며 강도가 높아집니다.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계속 늘리거나, 때로는 마치 누에가 그러하듯 좁은 틈으로 밀어내는 과정에서도 단백질 고분자들은 일렬로 배열됩니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결합도 활성화되면서 탄력성이 한층 더 강해집니다. 흔히 기다란 면은 무병장수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본다면 쫄깃한 식감을 위해 면이 이처럼 기다랗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훅은 현미경을 통해 세포를 처음 발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현미경 관찰을 너무나도 좋아한 나머지 수많은 대상을 관찰했는데, 그중에 누에고치도 있었습니다. 그는 누에고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면밀히 살핀 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 과정을 이용하면 인간이 직접 섬유를 생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과정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섬유가 아니라 면을 생산하고 있었죠.
날개를 펼치면 아름다운 세상을 만날 수 있는데, 왜 날지 않냐고 아무리 말해줘도 도무지 날고 싶지 않은 파랑새가 있다. 슬픔이 너무 깊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파랑새는 그저 홀로 숲의 그림자 속에서 침잠할 때가 가장 편안하다.
어느 날 수풀 사이를 걷다 사냥꾼에게 붙잡힌 파랑새는 인간들의 눈요기가 되다 버려진다. 도시의 뒷골목에 쓰러져 있는 그에게 다가온 건 발목에 쇠사슬을 찬 플라밍고. 플라밍고는 파랑새를 데리고 도시에서 탈출한다. 다시 숲으로 돌아온 파랑새는 예전처럼 외롭지 않다. 플라밍고는 파랑새가 날지 않는다고 다그치지 않는다. 둘은 함께 걷고, 열매를 따먹고 서로에게 기대어 잠이 든다.
여러 계절이 지나고 플라밍고의 몸이 가을처럼 바스락거린다. 털이 듬성듬성 빠지고 움직이지 못한다. 파랑새는 직감한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플라밍고는 세상을 떠난다. 그를 옥죄던 쇠사슬만 남긴 채. 플라밍고는 이제 자유로워졌을까. 파랑새는 플라밍고가 그리울 때면 부리로 그가 견디었을 쇠사슬의 무게를 재어본다. 플라밍고와의 시간을 떠올리며 시간을 견디다 보니 다시 봄이 왔다. 파랑새는 바람꽃을 물어와 플라밍고가 있던 자리에 놓는다. 때마침 바람이 불고… 파랑새는 파란 하늘 속으로 날아오른다. 하얀 구름 저 위로 높이, 아주 높이.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어떤 슬픔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 같다는 것을. 이유 없이 저무는 마음을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감당하기만 한다는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사실은 내 안의 어떤 것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을.
홀로 밤하늘을 바라보던 파랑새에서 시작된 책은 플라밍고와 함께 일출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닫힌다. 파랑새 곁에 묵묵히 있어준 플라밍고가 결국 파랑새를 날게 했다. 누군가에게 위로받은 마음은 그렇게 용기가 된다. 그리고 믿는다. 파랑새가 다시 누군가의 위로가 되어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결국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