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이혼변호사 박정희 사망 이후 정국 수습을 앞세워 전두환이 계엄령을 발동했던 1980년 4월21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위치한 (주)동원탄좌 소속 사북광업소 탄광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어용노조 등에 분노해 일어섰다. ‘일한 만큼 임금을 받고 인권을 존중받고 싶다’는 정당한 요구를 내세웠지만, 신군부의 보도통제를 받은 언론은 이들을 ‘빨갱이’ ‘폭도’로 낙인 찍었다. 당시 200여 명이 연행돼 고문을 당했고, 28명이 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북항쟁은 야만의 시대 국가폭력의 대표적 사례로 기록됐다.
그럼에도 사북항쟁은 공론의 장에서 속시원하게 이야기되지 않고있다. 2008년과 2024년, 국가인권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가 사북사건의 진실규명을 결정하고 국가의 사과와 피해 회복을 권고했지만 국가의 공식 사과는 없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주민들도 당시의 이야기를 피하려 한다.
오는 29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1980 사북>은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록하자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제작을 제안했던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 소장은 지난 24일 서울 용산 CGV에서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사북에 돌아왔을 때 아무도 사북항쟁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는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꼈다”고 말한다. 사북이 고향인 그의 아버지와 두 형이 광부였다. 그는 대학 동기인 박봉남 감독과 함께 당시 상황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영화는 사북항쟁을 촉발시킨 사북광업소의 열악했던 환경을 보여준다. 노동자들은 더운물도 잘 나오지 않는 닭장 같은 사택에 살았다. 적은 임금에 삶은 팍팍했고, 물자 공급마저 회사가 쥐고 있어 식료품은 물론 연탄까지 시내보다 더 비싼 가격에 구매해야 했다. 3000명이 일하는 탄광에선 매년 200명이 사망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건 개선을 노동조합에 호소했지만, 노조위원장은 번번히 사측편을 들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1980년 4월 21일, 노조위원장 사퇴와 위원장 직선제 도입을 주장하며 농성을 시작한다. 당시 현장을 채증하던 경찰이 현장에서 발각됐고, 경찰은 지프를 막아선 광부를 차로 깔아뭉갠 뒤 도망간다.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노동자들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사북지서로 뛰어든 노동자들은 경찰을 폭행하고 집기를 부순 뒤 광산으로 향하는 길을 틀어막고 농성에 돌입한다.
노동자들의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여 명의 경찰이 진압을 시도하자, 광부들은 격렬히 맞섰고, 이 과정에서 이덕수 순경이 시위대의 돌멩이에 맞아 숨진다. 노조위원장을 찾지 못한 노동자들은 그의 아내를 대신 잡아들여 폭행을 가했다. 사태악화에 군이 계엄군 투입 계획을 세우자 당시 강원도지사가 중재에 나섰고, 노동자들은 3일간의 항쟁 끝에 합의된 노동 조건들을 가지고 업무에 복귀한다.
투쟁의 성과를 누린 것도 잠시, 노동 현장에 군인들이 찾아와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한다. 정선경찰서로 연행된 200여명의 노동자와 아내들은 무자비한 폭행과 물고문 등을 당했다. 여성들의 옷을 강제로 벗기고 몸을 짓이기는 등의 성폭행이 자행되기도 했다. 너무 많은 시민이 잡혀 온 탓에 공간 분리조차 되지 않아, 넓은 강당 속에서 누가 어떻게 쓰러져가는지 다 보였다.
군인들은 다른 광부를 불면 놓아주겠다며, 서로 비난하고 지목하게 했다. 28명이 군사재판에 부쳐져 실형을 살거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마을 공동체는 붕괴됐다. 영화는 피해를 겪었던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들려준다.
박봉남 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찍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긴 고민의 필요했다”고 밝혔다. 경찰관 사망이나 위원장 아내 폭행 건 등 사북항쟁의 그림자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특정한 선악 구도를 만들지 않고, 이들의 공과를 포함한 모든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제작에 5년, 특히 편집에만 2년이 걸렸다. 사북항쟁을 겪은 이들의 증언이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화면을 보는 것 만으로도 고통스러워 편집을 한 달간 쉬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제작진이 바라는 것은 하나다.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과 치유다. 황 소장은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딱 맞다. 부서진 광업소의 사진만이 세간에 알려지고 200여명의 사람을 집단고문 했다는 기록은 없기에 피해는 지속되고 있다”며 “(다큐 개봉을 통해) 국가가 (사북항쟁에) 더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속보] 트럼프·다카이치, 도쿄서 첫 정상회담 시작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이 청년 세대의 성별 인식 격차에 대해 “청년 세대 중 불이익을 체감하는 영역에 대한 해소가 같이 되는 것이 성평등 사회로 나아감에 있어 꼭 필요하다”며 “어려운 문제를 회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원 장관은 23일 취임 첫 기자간담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점검을 지시한 ‘청년 남성 역차별’에 대해선 “병역 관련 부분이 가장 큰 것 같다”며 “감정을 토로하는 게 아니라 깊이있는 성찰을 하며 다른 곳을 바라본다는 분들이 모여 어떤 지점에서 차별로, 불이익으로 느끼는지 이야기하는 공론장을 기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평등부는 오는 29일부터 5회에 걸쳐 청년 대상 간담회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원 장관은 “젠더갈등이라는 용어보다는 시각차이, 인식차이라는 용어를 쓰고 싶다”며 “갈등이라는 용어를 쓸수록 갈등이 심화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각자 공정성을 느끼는과정에서 숙의 과정 통해서 공감하고 공존으로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라고 했다.
이 대통령이 원 장관에게 남성 역차별 점검 등을 여러 차례 지시하면서 성평등부가 역차별 담론에만 비중을 두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 바 있다. 성평등가족부는 확대 개편 과정에서 성별 불균형 조사·연구를 담당하는 성형평성기획과를 신설하고 주무과로 배치했다.
원 장관은 이와 관련해 “많은 분들의 우려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역차별 담론에 집중해서 구조적 성차별 해소에 집중하지 않는 거냐는 우려는 저희 부처의 업무를 보면 아니라는 점을 알 것이다. 성형평성기획과가 다루는 의제가 전체 성평등 업무를 다루기 위해 오히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원 장관은 성평등 정책 추진을 위해 국무총리 소속 양성평등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으로 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의에 대해선 “대통령 직속 위원회더라도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 여러 위원회를 경험하지 않았느냐”며 “소속과 사무국 여부에 무관하게 현재 국무총리 소속의 성평등위원회 안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최근 캄보디아에서 확인된 인신매매·성매매 사건에 대해선 “인신매매 피해 사실이 확인된 분들의 심리·법률지원이 마련돼 있다”며 “실질적인 도움이 이뤄질지 의구심을 가질 수 있지만 국내든 해외든, 인신매매든 성매매든 성평등부나 피해자 지원 상담소로 연락하면 최선을 다해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성평등부는 캄보디아 사태 관련 경찰청에 인신매매 피해자에게 성평등부의 지원체계를 안내하고 지원 연계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원 장관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성매매 여성 비범죄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원 장관은 “현장에서 본 성착취 수요를 차단하기 위해선 성매매 여성 비범죄화가 답이란 생각을 했었다”며 “그간 도외시됐던 성매매가 우리 사회에 갖는 의미와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성격에 대해 많은 분께 알리고 다른 부처와 수요 차단을 해나가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