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트럴에비뉴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대화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히면서 향후 북·미 대화 가능성이 주목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그간 김 위원장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오는 10월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회동이 성사될지 관심이 쏠린다.
김 위원장은 지난 21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3차 회의 연설에서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버리고 “현실을 인정한 데 기초해 우리와의 진정한 평화 공존을 바란다면 우리도 미국과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2일 보도했다. 미국이 북한을 대등한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상태에서 관계 개선을 바란다면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뜻이다. 비핵화 협상에는 임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은 “아직도 개인적으로 현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두 정상은 2018~2019년 세 차례 만남과 친서 27통 교환으로 소통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은 이날 자신이 2021년 6월 ‘대화에도 대결에도 다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말한 점을 언급하며 “대응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과 원칙이 있을 수 있지만 모든 것에 대비할 준비가 돼 있다”고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과거 친분과 4년 전 발언을 상기한 것은 대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위원장은 연설에서 미국의 핵 위협에 따른 정세 악화와 핵보유국이 헌법에 명시된 점을 거론하며 “단언하건대 우리에게서 ‘비핵화’라는 것은 절대로,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또 “제재 풀기에 집착해 적수국들과 그 무엇을 맞바꾸는 것과 같은 협상 따위는 없을 것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했다. 2018~2019년 북·미 정상회담 때처럼 비핵화와 제재 해제를 교환하는 방식에 선을 그은 것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핵보유국을 인정받은 상태에서 미국과 관계 개선을 한다면, 제재의 해제나 완화는 부수적으로 따라올 것이기 때문에 제재 해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무엇을 주고받기보다는 핵보유국으로서 대등한 대화와 관계 개선 구도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미국 등이 비핵화를 내세우면서 제재·압력을 계속 가하면 “우리에게는 더 유리하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목적한 일을 할 시간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성과가 필요한 정치 상황을 이용해 미국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김 위원장이 지난 4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을 통해 북·중관계를 복원한 것을 계기로 미국과의 협상을 염두에 둔 행보에 나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10월 말 경주 APEC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을 때 김 위원장과의 접촉이 이뤄질지 주목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연내에 김 위원장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두 정상은 2019년 6월 비무장지대(DMZ) 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회동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핵보유국 인정 요구를 받아들일지는 불투명하다.
외교부는 김 위원장의 연설 내용을 두고 “정부는 앞으로 평화 분위기 안에서 남북 간 신뢰를 회복하고 북·미 회담 재개를 촉진하는 여건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노력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 나갈 것”이라며 “한·미는 향후 북·미 대화를 포함, 대북정책 전반에 관해 긴밀한 소통과 공조를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코인야스민 자헤르 지음 | 진영인 옮김 | 민음사 | 292쪽 | 1만7000원
“알다시피 나는 가방이 힘을 전혀 쓰지 못하는, 폭력만이 목소리를 내는 장소에서 왔다. 그러다 별안간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싶은 물건을 가진, 다른 사람이 연출하고 싶은 모습의 여자가 된 것이다… 때로는 아주 작은 부분이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문이 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뉴욕에 정착한 팔레스타인 여성이다.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사고로 돌아가신 부모에게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는다. 여유로운 이민자의 모습을 한 그는 어머니가 물려준 에르메스 버킨백을 들고 이세이 미야케 정장 혹은 미우미우 팬츠, 쿠치넬리 캐시미어 스웨터를 걸친다. 자본주의의 첨병, 뉴욕이라는 도시에 걸맞은 모양새다.
반듯한 겉모습과 달리 그의 안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강박적으로 청결에 집착한다. 수시간에 걸친 목욕 의식 속에서 그는 “도자기 같고 순수하고 티 하나 없는 피부의 세계 수도인 한국에서 수입한 제품”으로 피부를 닦아낸다. 그는 어린 시절 삼킨 동전이 자신의 몸속에 남아 있다는 생각에 아무리 씻어도 개운함을 느끼지 못한다.
명품에 집착하고 청결에 과민한 팔레스타인 여성과 뉴욕의 합은 맞는 듯 맞지 않아 보인다. 부유한 자산 계급이라는 자본주의 도시에 딱 맞는 그의 사회적 위치는 인종이라는 한계로 인해 불완전하다.
“나는 묘지와도 같은 땅에서 왔다. 수천 년 동안 온갖 사람들이 그곳에서 태어나고 죽고 살해당했다. 몇몇은 심지어 부활하거나 다시 태어났다. 그곳은 피비린내와 공포가 가득한 비운의 땅이자, 인간에게 속한 땅이었다.”
소설은 이 같은 정체성의 혼란을 부각해 한껏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야기는 뉴욕의 사립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그녀의 일상과 함께 천천히 진행된다. 영문학을 잘 모르는 주인공은 주로 자유 수업을 하며 “제이, 넌 언제나 반듯해 보여야 해. 흑인 소년이니까 더 그래. 사람들이 인종주의자인 거 알잖니. 그렇지만 매번 하는 말인데, 그들은 멍청하기도 하단다”라고 가르친다.
동유럽 출신 이민자인 남자친구 사샤, 그녀가 ‘트렌치코트’라고 부르는 한 남성과의 만남도 이야기의 주요 줄기다. 사치품이라는 키워드는 빠지지 않는다. 그녀가 트렌치코트와 함께 버킨백을 사러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의 매장을 돌아다니는 과정이 꽤 길게 서술돼 있다.
다만 주인공은 이 같은 일상에서 라디오를 통해 “가자지구에서 오십오 명이 죽었다는 뉴스”를 듣는다. 물론 “나는 가슴을 쑤시는 듯한 아픔을 느꼈”으나 “고개를 들어 나무를, 하늘을 보니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느낄 뿐이다.
뉴욕과 버킨백, 디아스포라의 삶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가 정리되지 않은 채 혼란스럽게 책 속에서 펼쳐진다. 미국은 그녀의 선대를 비롯해 수많은 이민자들이 꿈꿔온 땅이다. 그러나 “미국이 해외에서 저지른 일들, 베트남이며 과테말라, 특히 우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한 일들이 있었다… 내 말은, 악마가 어떻게 꿈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라는 말은 그녀의 삶이 어째서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모양새를 가졌는지 추측게 한다.
소설은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 혹은 독백처럼 이어지는데, 이것은 마치 그녀의 무의식을 그대로 옮겨낸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문장은 시적이고 언뜻 초현실적이며 즉흥적으로 보인다. 속물적이면서도 우아한 주인공이 쏟아내는 위트와 리듬감이 살아 있는 문장이 매력적이다.
저자는 팔레스타인 저널리스트로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이번이 첫 장편이다. 2024년 미국에서 출간된 책은 ‘뉴요커’ ‘타임’ 매거진 등에서 올해 최고의 책으로 꼽혔다. 올해 영어로 쓰인 책을 쓴 젊은 작가들에게 수여하는 딜런 토머스상을 수상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중심 도시인 가자시티에 지상군을 투입하는 등 폭력적인 군사 행위의 참혹함이 다시금 부각되는 지금, 또다시 주목이 가는 책이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책의 추천사에서 “팔레스타인을 서구 문명의 폭력적인 타자로 치부하던 사람들은, 이 팔레스타인 작가야말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이 세계의 진실을 꿰뚫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