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폰폰테크 국제사회는 이스라엘과 이란 간 분쟁이 고조되는 것에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면서도 유럽연합(EU)과 서유럽은 이스라엘을 지지했고 사우디아라비아, 튀르키예, 중국 등은 이스라엘을 규탄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4일(현지시간) 엑스에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과 통화했다”며 “긴장 고조를 막기 위해 최대한 자제해 줄 것을 당부했다”고 밝혔다. 전날 마크롱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접근 방식과 군사 작전의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란의 우라늄 농축 상황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 결정을 내리게 했다”면서 프랑스가 이스라엘 방어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대이란 군사작전엔 개입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상황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동맹들과 이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계속해서 긴장을 완화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13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유익하고 건설적인 논의를 나눴다”며 “영국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에 대해 오랫동안 우려했다.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영국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충돌이 확대되는 상황에 대비해 전투기 등 군사자산을 중동에 추가 배치하기로 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이츠하크 헤르초그 이스라엘 대통령과 통화했다며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하는 동시에 모든 당사자에게 자제와 긴장 완화를 촉구했다.
반면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요르단 등은 이스라엘을 규탄했다. 사우디 외교부는 성명을 통해 이스라엘의 대이란 공격을 “노골적인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이스라엘의 공격은 이란의 “주권과 안보를 침해하고 명백히 국제법과 국제규범을 위반한다”고 비판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통화하며 이스라엘이 “이 지역의 안정과 안보에 대한 주요 위협”이라고 비판했다.
왕이 중국공산당 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은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교장관에게 “중국은 이란의 국가 주권 수호, 정당한 권익 수호, 국민 안전 보장을 지지한다”는 뜻을 전했다.
레오 14세 교황은 이날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희년 알현 행사에서 “현 사태를 매우 우려스럽게 지켜본다”며 “이처럼 민감한 시기에 책임감과 이성을 갖기를 다시 한번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어 “핵 위협이 없는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상호 존중과 진정성 있는 대화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며 “이는 정의, 형제애, 공동선을 바탕으로 한 지속 가능한 평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거장 알프레트 브렌델이 별세했다. 향년 94세.
17일(현지시간) 가디언과 BBC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고인은 이날 영국 런던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
넓이보다 깊이를 추구한 브렌델은 레퍼토리가 넓지는 않았으나 리스트, 슈베르트, 베토벤, 모차르트, 하이든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특히 32개의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1960년대, 1970년대, 1990년대 세 차례나 녹음한 베토벤 해석의 권위자다. 5개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은 무려 네 차례나 녹음했다.
브렌델은 현란한 기교로 관객을 압도하기보다 지적이고 사색적인 연주로 이름을 날렸다. 뉴욕타임스(NYT)는 “(브렌델은) 우리를 작곡가의 심장과 영혼으로 데려가는 대신 소나타를 엑스레이로 해부하듯 보여줘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했다.
브렌델은 다른 대가들과 달리 이른 나이부터 눈부신 천재성을 발휘한 유형의 연주자는 아니었다.
브렌델은 1931년 7월5일 체코슬로바키아(현재의 체코)의 모라비아 지역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유고슬라비아 자그레이브(현 크로아티아 자그레이브)에서 피아노를 배웠고, 이후 오스트리아 그라츠 음악원을 거쳐 16세이던 1947년 빈 음악원을 졸업했다. 이후로는 공식적인 음악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자신의 음악을 완성했다.
그의 콩쿠르 경력은 1949년 부소니 피아노 콩쿠르에서 4등을 한 게 전부다. 복스나 뱅가드 같은 마이너 레이블에서 꾸준히 음반을 출시했으나 메이저 음반사들은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1960년 런던 퀸엘리자베스홀에서의 공연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1981년 NYT와 인터뷰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람들이 내 연주에 열광했다”면서 공연 후 메이저 음반사들의 계약 요청이 쇄도했다고 밝혔다.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서는 “주전자에서 물을 데우고 있다가 갑자기 끓기 시작해서 거품이 일고 증기가 나오는 그런 느낌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브렌델은 굵은 뿔테 안경에 흐트러진 머리가 트레이드마크였다. 1998년에 출간된 그의 시집 후기에 따르면, 이 때문에 뉴욕에서는 영화감독 우디 앨런과 그를 혼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브렌델은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알프레트 브렌델의 피아노를 듣는 시간>, <알프레트 브렌델 아름다운 불협음계>, <알프레트 브렌델 뮤직, 센스와 난센스>는 국내에서도 출간된 적 있다.
브렌델의 제자인 영국 출신 피아니스트 이모젠 쿠퍼는 가디언에 “음악은 물론 문학과 다른 예술에도 해박했던 브렌델은 피아니스트들의 만신전에 오른 이들 중에서도 독특한 존재였다”고 말했다.
60년 이상 무대에서 연주한 그는 2008년 12월 빈 필하모닉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인 9번을 연주한 것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강연, 독서, 세미나, 집필 등에 집중했다.
고인은 생전에 베를린 필하모닉의 한스 폰뷜로 메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음악상, 에른스트 폰 지멘스 상 등을 수상했다.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예일대, 줄리어드 등 수십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페이스북에 고인과 찍은 사진 네 장과 함께 영어로 추모의 글을 올렸다. “마에스트로 알프레드 브렌델, 편히 잠드시길. 제가 지금과 같은 피아니스트가 된 데는 당신의 영향이 컸습니다. 당신의 음악과 영감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