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테크 홈페이지 본관이 어디냐는 질문에 잠시 눈앞이 하얘졌다. 우물쭈물하니 친구의 아버지가 먼저 “요즘엔 성을 묻는 사람이 잘 없지” 하고 속을 헤아려줬다. 대체 어른들은 남의 집 족보가 왜 궁금한 걸까? “그게 어른들한텐 일종의 MBTI 같은 거지.” 친구는 자신의 아버지를 변호하듯 멋쩍게 말했다. 나는 친구 아버지가 준 배 한 상자를 트렁크에 실으며 호쾌하게 웃었다. 친구야,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익현(최민식)은 ‘어디 최씹니까?’라는 질문 하나로 주먹 세계의 실세가 됐어. 한국 사회에서 뿌리를 안다는 건 그만큼 강력한 힘인 거야. 참… 난 경주 최씨도 아닌데 이렇게 좋은 배를 받아도 되는 건지…
본관을 알려준 대가로 받은 배는 달고 시원했지만, 남의 족보를 묻는 게 거북하다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경상도 집성촌에서 조선시대부터 대를 이어 살아온 나의 조부모는, 내가 겨우 말을 뗐을 때부터 가문의 큰 인물이 세운 업적들을 읊어주던 분들이었다. 400년 전 죽은 내 조상의 기분까지 알고 싶지 않았던 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들의 밑에서 탈출하려 안간힘을 썼다. 가문의 영광을 다 왼다 해도 결국 다른 집안의 며느리로 살아갈 미래뿐인 손녀는 그것이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종로3가는 정말 좋지 않니. 악기를 든 사람, 영화를 보는 사람, 직장인, 노인, 게이들… 모든 사람이 은은한 수육 냄새를 뒤집어쓰고 어두운 지하상가 밑을 걸어야 하잖아.” 나에게 서울이란 영원히 종로다. 열일곱 살이던 2006년엔 박찬욱을 좋아하던 친구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에릭 로메르의 <여름 이야기>를 봤다. 영화가 끝난 후 우리는 밤공기에 취해 넓은 보폭으로 춤을 추듯 걸었다. 바쁘게 종로를 누비는 서울 사람 중 하나가 되어서. 마치 서울의 모든 곳이 우리의 땅이라도 된 것처럼.
밤이 너무 길어
영화 <3670>의 주인공 철준(조유현)이라면 그날 밤 내가 느낀 감정을 알고 있을 것이다. 동성애자인 철준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탈북청년이다. 그는 ‘새터민 장학금’을 주는 교회와 탈북민 모임 등에 참여하며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늘 ‘게이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갈증에 시달린다. 그런 철준에게 종로3가란 진정한 정착을 위한 마지막 관문이자, 황홀한 욕망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혈관 같은 골목마다 촘촘히 뻗어 있는 ‘이쪽’의 공간들이 철준의 눈앞에 펼쳐진다. 데이팅 앱의 알림 소리와 ‘쿵쿵’ 울리는 음악 소리가 심장 박동과 함께 화려한 리듬을 만드는 종로는 아마도 철준이 정착하고 싶었을 바로 그 환상 속 타향이다.
하지만 작심하고 나간 종로 ‘술 번개’에서 철준은 끝내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쓸쓸함에 켠 데이팅 앱에는 ‘탈북민 친구를 찾는다’는 자기소개를 비아냥거리는 메시지만 쌓인다. <3670>은 철준을 통해 타자가 내부로 편입되는 것이 얼마나 사소하고 반복적인 거절들로 이루어지는지, 또 탈북자이자 동성애자라는 이중의 소수자성이 철준의 위치를 얼마나 위태롭게 만드는지를 말하며 그런 철준을 환대하는 인물 영준(김현목)을 통해 그럼에도 ‘나’라는 존재를 부정당한 이들이 어떻게 서로를 돌볼 것인지, 그 연대가 가능한 공간의 조건은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뿌리가 잘린 사람들
우리는 ‘내부’와 ‘외부’를 어떻게 구분할까? 철준과 내가 서 있던 종로는 그 구분을 밤마다 바꿔 적는 동네였다. 수육 냄새에 내 정체를 감출 수 있는 수상한 은신처로, 환상과 좌절을 모두 맛보게 하는 얄미운 종착지로.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이런 공간은 뿌리가 잘린 사람들에겐 그 묘한 품을 내어주는 상실감의 고향이다.
가족의 역사를 통해 나를 이해하는 건 인간에게 무척 중요한 실천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뿌리’를 찾는다는 건 곧 타인을 차별할 무기가 되기에, ‘혈통’ ‘출신’, 나아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껄끄럽다. 그런 추궁을 즐기는 사람들은 ‘무시해도 될 만한 것’을 구분하고, ‘이익이 되지 않는 정체성’을 자연스레 줄 세운다. 그들에게 인간의 정체성이란 고정된 실체이며, 맥락을 지니지 못하는 텅 빈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영사관 앞에서, 명동에서,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댓글에서. 그들은 우리 사회를 함께 이루고 있는 종족에게 멸시를 쏟아내느라, 세상이 얼마나 다양한 뿌리로 얽혀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뿌리 없는 조화로 메우기 위해 핏대를 세운다.
인간의 뿌리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돋아난다. 서로의 흔적을 엮어 매일 새로운 고향을 만들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감히 정착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의 지형은 어떻게 달라질까?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네 땅으로 돌아가라’를 외치는 사람에게도 그런 이동과 정착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겠지.
“개미집 없이 개미라는 종을, 벌집 없이 벌을 생각하기 어렵듯이 이제 기술 없이는 인간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SF 문학 거장 켄 리우(49)는 15일 서울시 중구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나 기계문명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제1회 MCT페스티벌 참석차 한국을 처음 찾았다.
휴고상,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모두 석권한 그의 대표작 ‘종이 동물원’(2011)은 결혼을 통해 미국으로 이주한 중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의 이야기다. 국제 매매혼을 소재로 다루면서도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밀도 높게 담았다. 어머니가 종이로 접어준 호랑이가 살아 움직인다는 설정은 환상성을 높인다.
중국계 미국인인 리우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겼을 것 같지만 그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며 “가난한 나라 출신의 여성이 더 나은 삶을 살고자 부유한 국가의 남성과 결혼하는 이야기를 접하고 작품을 구상했다. 삶을 바꾸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 그 여성들이 용감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1세 때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리우는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해 변호사로 일했고, 마이크로소프트 프로그래머로 일하기도 했다. 삶의 이력처럼 소설도 다양한 관심사로 뻗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731 부대부터 대만 2·28 사건,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 등 각국의 역사적 사건들도 작품 안에 담았다. “역사는 공동체가 (하나의 사건을) 어떻게 스토리텔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모든 국가에 그 국가의 근본을 이루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세계의 중심은 SF적 상상력이다. 그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시체에 생명을 준다는 설정은 지금 봐도 현실과 동떨어지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그 작품을 좋아하는 건 프랑켄슈타인이 상징하고 은유하는 것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SF로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지 않는다”면서 “지금은 어떤 예측을 해도 6개월이면 틀리다고 판명나는 세상이다. 내 목적은 (프랑켄슈타인 같은) 현대의 신화적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이 인간의 미래를 희망으로 채울지 절망으로 채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인류 공동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미래는 타인이 아닌 각자에게 달려있다”며 “각자 자신의 역량을 잘 발휘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