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쳐캐피탈 “나 어디서 왔어요?”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못했다. 아무도, 아무도.그녀는 세 살 이전의 ‘나를 모른다’.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태어난 해(1993년) 말고는 내가 어느 달 어느 요일에 태어났는지. 성이 왜 정씨인지. 승희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줬는지. 산골 간이역처럼 쓸쓸하고 적막한 기억의 첫 페이지, 그녀는 춘천의 보육원에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자신에게 엄마아빠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그리움이라는 돌림노래가 시작됐다. “그리워.”입 없이, 목소리 없이 혼자 부르는 돌림노래였다. 그러다 문득, “내가 그리워하는 건 뭘까?”처음부터 ‘없음’이었던 존재를 그리워할 수 있나? 실루엣조차 본 적도, 살며시 살갗이 스친 적도, 얼핏 체취를 맡아본 적도, 메아리 같은 희미한 목소리조차 들어본 적 없는 존재. 없고, 없고, 없고가 눈금자의 눈금들처럼 촘촘히 강박적으로 무한히 반복되는 존재를 그리워할 수 있나? 고등학...
18세기 말 프랑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이름은 클로드 피노슈. 그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 버려졌고, 16세에 왕의 군대에 들어가 장교가 된다. 방탕한 삶을 살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의 정체를 깨닫는다. 인간이 아닌, 흡혈귀라는 사실을.그즈음, 프랑스 혁명이 불처럼 일어난다. 왕과 왕비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동안 피노슈는 “농민처럼 입고 혁명가 행세”를 하며 살아남는다. 그리고 자신이 섬기던 왕의 충복으로서 세상의 모든 혁명에 맞서기로 결심한다.그는 프랑스를 떠난다. 이후 그가 머물렀던 나라는 아이티, 러시아, 알제리. 노예가, 농민이, 식민 지배에 신음하던 이들이 구체제를 뒤엎은 나라들이었다. 그리고 1935년, 그는 스스로 왕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왕 없는 농민의 땅”을 선택해 그 나라의 군인이 된다. 스스로 지은 이름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였다. 흡혈귀 피노슈, 그러니까 피노체트는 마지막으로 칠레의 사회주의 혁명을 끝장내고 스스로 끔찍한 왕, 지독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