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폰테크 논어는 시가 있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시(詩)는 아니고 시(時)다. 둥근 지구를 딛고 휘어진 공중에 기대 사는 동안, 시간을 벗어날 수 있을까. 시(詩)도 시(時)다. 이 말은 한 구절 모자라서 단시(短詩)도 아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공자는 말(言)을 많이 다루었다. 시도 중요하게 여겼다. 아들에게 말한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단다(不學詩, 無以言).”
한자는 하나의 품사에 갇히지 않는다. 오늘에서 내일로 가는 시공의 흐름을 생각한다면 명사도 실은 늙어가고 낡아가는 동사일 수밖에 없다. 시(時)는 시(詩)다. 모든 때는 반지 같은 한 편의 시를 남긴다. 굽이굽이 삶의 국면과 시는 도시락처럼 궁합을 꽉 맞춘다.
서른 무렵, 혼인하고 아이 둘이 차례로 태어났을 때의 시. “그대가 결혼을 하면 여인은 외부로 열린 그대의 창, (…) 그 여인에게서 아이를 얻으면 그대의 창은 하나둘 늘어난다.”(이성복) 아, 시간이 흘러 어머니 돌아가시고 돌연 연락이 끊겼다. 기억으로 그리움을 달래던 어느 날 손잡고 계단을 오르는데, 문 앞에서 말씀하신다. 야야, 난 고마 안 들어갈란다, 소스라쳐 놀라 깰 때의 시. “가까운 이가 죽음을 맞이하는 건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일어나는 일/ (…)/ 그러나 아주 이따금/ 자연이 작은 호의를 베풀 때도 있으니/ 세상을 떠난 가까운 이들이/ 우리의 꿈속에 찾아오는 것.”(쉼보르스카) 이럴 때 꿈은 우리 고향 뒷동산 이상의 실제 면적이 된다. 바다에 파도 일듯 삶의 정거장에서 고약한 일은 더러 일어난다. ‘이명래고약’도 아니라서 약으로도 쓸 수 없는 고약. 그 난처한 지경은 이런 구절 덕분에 잠깐의 어리둥절로 처리할 수 있었다. “어렸을 적 낮잠 자다 일어나 아침인 줄 알고 학교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황지우)
백두산 꽃산행, 연변 내두산촌, 어느 고갯길, 노란 민들레, 폭신한 꽃잎, 뒹구는 뒤영벌, 쪼그리고 앉아 관찰할 때의 시. “눈보라는 꿀벌 떼처럼/ 잉잉거리고 설레는데/ 어느 마을에서는 홍역이 철쭉처럼 난만하다.”(정지용) 과연, 백두산의 만년설이 보이고, 가까이에 윤동주의 고향도 있고, 조선족 마을마다 “굴뚝이 밥맛을 풍기며 연기를 토한다”(세사르 바예호).
시란 무엇인가. 시란 언제인가. 詩도 時도 시라 읽는 우리말이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