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폰테크 윤석열 전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을 수사하는 민중기 특별검사팀 파견검사들이 20일 업무를 시작했다.
민 특검은 이날 기자들에게 “파견 요청한 검사들이 오늘 출근해 근무 중”이라고 밝혔다.
민 특검은 전날 법무부에 채희만 대검찰청 반부패2과장(사법연수원 35기), 한문혁 서울동부지검 형사5부장(연수원 36기), 송봉준 대검 선거수사지원과장(연수원 36기), 인훈 울산지검 형사5부장(연수원 37기), 정선제 부산지검 서부지청 형사3부장(연수원 37기) 등 5명 파견을 요청했다. 이들 중 개인 사정이 있는 1명을 제외한 4명이 이날 출근했다.
채 과장은 서울남부지검이 수사 중인 ‘건진법사’ 전성배씨 관련 사건 보고 라인에 있었다. 한 부장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수사에 2021년에 이어 현재도 서울고검 재수사팀에서 참여하고 있다. 인 부장은 서울중앙지검 명태균 의혹 전담수사팀에서 공천개입 사건 수사에 참여했다.
민 특검은 4명의 특검보 및 파견된 부장검사들과 상의해 추가 파견검사 등 명단과 수사팀 조직을 짤 예정이다.
백제가 한성에서 밀려나 웅진(공주)에 도읍한 시기 왕들의 무덤 중 하나를 개로왕의 손자였던 삼근왕으로 추정할 수 있는 증거가 나왔다. 백제에서 무령왕릉에 이어 무덤 주인을 특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큰 발견이다. 웅진 시기 백제는 왕이 세 명 연속 암살당한 혼란기로만 여겨졌지만, 당시 나라 체계를 유지하며 대외 활동에 나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유물들도 함께 확인됐다.
국가유산청과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는 “백제가 웅진에 도읍한 475년부터 538년까지 재위한 왕들의 묘역이 모여있는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재조사 결과 2호 무덤 주인이 백제의 제23대 왕인 삼근왕(477~479년)으로 추정된다”고 17일 밝혔다.
왕릉원 묘역에는 무령왕릉을 포함해 주요 무덤 7기가 존재한다고 알려졌으나, 일제강점기에 도굴된 뒤 제대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연구소는 2023년부터 1~4호 무덤을 재조사하던 중 2호 무덤에서 화려한 금귀걸이와 함께 어금니 2점을 찾았다. 법의학 분석 결과, 어금니 주인은 10대 중후반으로 파악됐다. 자문에 참여한 이우영 가톨릭대 해부학교실 교수는 “오른쪽 윗턱에 있던 치아들인데 닳아있는 정도(교모도)를 봤을 때 10대 청소년기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21대 개로왕이 죽고 다급히 웅진으로 천도했다. 개로왕의 아들인 22대 문주왕은 재위 3년 만에 암살되고, 13세에 즉위한 삼근왕도 재위 3년에 죽었다. 이어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 24대 동성왕은 정치·군사적 안정을 되찾았지만 역시 암살당했고, 25대 무령왕에 이르러 ‘다시 강국이 되었음(更爲强國)’을 선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면 2호 무덤의 주인은 유일한 10대였던 삼근왕일 가능성이 높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된 지 50여년이 지났으나, 삼국시대 왕릉급 무덤 대부분의 주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무덤 주인이 확실해지면 큰 의미가 있다.
2호분과 인접한 1호분은 문주왕릉일 가능성도 높아졌다. 두 무덤이 인접한데다 구조나 크기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정재윤 공주대 사학과 교수는 “무령왕릉과 왕릉원이 자리잡은 송산에는 두 갈래 능선이 있는데 첫 번째 능선에 무령왕계 무덤이 있고, 이번 1~4호분이 문주, 삼근왕의 무덤으로 추정됐다”며 “왕릉의 묘역이 가계에 따라 구별되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3,4호분은 삼근왕 관련 인물로 추정됐다. .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서는 정황만 있던 역사 기록의 공백도 메워볼 수 있다. 2호분에선 청색의 유리옥이 달린 정교한 금 귀걸이 등 화려한 유물들이 출토됐는데 제작 형태로 미루어 한성기와 웅진 후반기(무령왕릉)의 중간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도 높은 수준의 금세공기술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함께 발견된 은에 금을 도금해 줄무늬를 새긴 반지와 비슷한 형태의 금반지가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바 있어 백제와 신라의 긴밀한 외교 관계도 미루어 알 수 있다. 철에 은을 씌워 장식한 오각형 형태의 칼 손잡이 고리 장식은 앞서 나주와 논산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중앙에서 지방에 하사한 위세품으로 볼 수 있어, 백제 지방 시스템이 작동한 것으로 해석됐다.
여러 종류의 유리 옥 1000여점도 수습되었다. 이 중 황색과 녹색 구슬에 사용된 납 성분은 무령왕릉과 동일하게 산지가 태국으로 분석되어, 당시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교역망도 잘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인호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장은 “정치적 혼란기로만 인식되었던 웅진기 전반부터 백제가 이미 내부 정치 체계와 대외 교역망을 잘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웅진기 전반 외교를 발판으로 무령왕이 다시 강국을 선언하고, 성왕은 사비로 도읍을 옮겨 한층 성숙한 문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다만 당시 정황과 치아만으로 무덤 주인을 확정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황인호 소장은 “유물을 파괴해야 DNA 조사나 방사성 탄소연대를 통해 연대를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다”며 “필요하다면 두 점 중 한 점은 파괴 분석을 해볼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