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제주 트레킹, 마지막 날... 아픈 역사 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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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183.♡.113.206) | 작성일 | 25-06-09 11:47 | ||
7일 제주 트레킹, 마지막 날... 아픈 역사 지닌 제주를 다시 생각하며2025년 4월 24일부터 7일간 제주 트레킹한 기록입니다. <기자말>이전 기사: 제주 보물, 사려니숲길의 '사려니'에 담긴 뜻이 이거였구나 여행 7일째,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나는 처음 바다를 보았다. 일행들은 휴식일에 개인적으로 서귀포 바닷가를 접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은 걸매 생태공원과 칠십리 공원에서 멍 때리며 늘어지게 쉬었을 뿐이다. 별 이유는 없고 단지 여행객의 티를 내지 않고 서귀포 주민처럼 행동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특이한 게 있었다면 칠십리 공원에서 멀리 있는 천지연 폭포를 보았다는 것이다.그렇게 해서 나와 일행은 올레길 6코스를 잠깐 걷기 위해 숙소에서 각자 짐을 챙기고 나와 한가롭게 걷기 시작했다. 회복 운동 성격의 하이킹이어서 두어 시간 걷고 오전에 마무리할 참이었다. 연이은 4번의 트레킹으로 인해 몸은 다소 무거웠지만 한편에선 안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코스는 서귀포 시내를 관통하여 정방폭포를 지난 후 해안가 올레길로 이어진다.손바닥 단칸방에 4명이... 서귀포에서 10개월 보낸 이중섭잠시 서귀포 중심지를 지나다 보면 이중섭로를 걷게 되고 금방 이중섭 기념관이 나타난다. 올레길 코스를 의도적으로 이곳과 연계시킨 것이다. 그곳엔 이중섭이 살았다는 조그만 초가집이 전시되어 있다. 손바닥만 한 단칸방인데 그 좁은 공간에서 4명이 살았다고 한다. ▲ 이중섭이 거주하던 곁방ⓒ 안호용이중섭은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피난민 대열에 합류하여 미군 화물선을 타고 원산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자신의 모든 삶이 파괴되었던 그는 아내 마사코와 어린 두 아들만 데리고 피난민 대열에 오른 것이었다. 부잣집 아들에 예술 밖에 몰랐던 그에겐 피난민 생활은 가혹한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혼돈의 부산은 그에게 최소한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마사코도 부잣집 딸에 일본인이어서 생활력을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지난한 생활이 이어지던 당시 정부로부터 소개령이 발효되자 어디로 갈7일 제주 트레킹, 마지막 날... 아픈 역사 지닌 제주를 다시 생각하며2025년 4월 24일부터 7일간 제주 트레킹한 기록입니다. <기자말>이전 기사: 제주 보물, 사려니숲길의 '사려니'에 담긴 뜻이 이거였구나 여행 7일째,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나는 처음 바다를 보았다. 일행들은 휴식일에 개인적으로 서귀포 바닷가를 접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은 걸매 생태공원과 칠십리 공원에서 멍 때리며 늘어지게 쉬었을 뿐이다. 별 이유는 없고 단지 여행객의 티를 내지 않고 서귀포 주민처럼 행동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특이한 게 있었다면 칠십리 공원에서 멀리 있는 천지연 폭포를 보았다는 것이다.그렇게 해서 나와 일행은 올레길 6코스를 잠깐 걷기 위해 숙소에서 각자 짐을 챙기고 나와 한가롭게 걷기 시작했다. 회복 운동 성격의 하이킹이어서 두어 시간 걷고 오전에 마무리할 참이었다. 연이은 4번의 트레킹으로 인해 몸은 다소 무거웠지만 한편에선 안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코스는 서귀포 시내를 관통하여 정방폭포를 지난 후 해안가 올레길로 이어진다.손바닥 단칸방에 4명이... 서귀포에서 10개월 보낸 이중섭잠시 서귀포 중심지를 지나다 보면 이중섭로를 걷게 되고 금방 이중섭 기념관이 나타난다. 올레길 코스를 의도적으로 이곳과 연계시킨 것이다. 그곳엔 이중섭이 살았다는 조그만 초가집이 전시되어 있다. 손바닥만 한 단칸방인데 그 좁은 공간에서 4명이 살았다고 한다. ▲ 이중섭이 거주하던 곁방ⓒ 안호용이중섭은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피난민 대열에 합류하여 미군 화물선을 타고 원산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자신의 모든 삶이 파괴되었던 그는 아내 마사코와 어린 두 아들만 데리고 피난민 대열에 오른 것이었다. 부잣집 아들에 예술 밖에 몰랐던 그에겐 피난민 생활은 가혹한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혼돈의 부산은 그에게 최소한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마사코도 부잣집 딸에 일본인이어서 생활력을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지난한 생활이 이어지던 당시 정부로부터 소개령이 발효되자 어디로 갈지 망설이던 그는 마침 제주에 살던 조카 이영진의 주선으로 다음 해 1월 가족을 데리고 제주도로 떠났다. 유랑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렇다고 제주라고 해서 그를 반겨주지는 않았다. 더구나 4.3 사건이 여전히 진행 중이어서 원산에서 온 그는 요주의 인물로 취급받았다.그런 그의 상황을 안타깝게 보던 어느 주민의 조언으로 그는 다시 제주시를 떠나 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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