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중계 화면 아래 쪽으로 깎아지른 듯 날카로운 모서리를 드러낸 V자. 파랑, 빨강, 하양, 노랑색 물감의 선명한 대비와 칼로 자른 듯 명확한 경계가 강렬한 느낌을 준다. 나이프로 얇게 펴 바른듯한 투명한 물감은 독특한 질감을 드러낸다.미국의 추상화가 케네스 놀랜드(1924~2010)의 ‘Profile’(1985)다. 날카롭게 테두리진 단순한 형태에 색면을 강조했던 ‘하드에지(Hard Edge) 페인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전후 미국에서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가 미술계를 뜨겁게 달군 뒤 등장한 일군의 예술가들은 회화에서 ‘인간다움’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기계가 그린 것처럼 정확하고 차가운 선, 미니멀한 형태, 색채 자체에 집중한 그림을 선보였다. 워싱턴색채파의 일원이었던 놀랜드는 1950~60년대 미국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다.서울 용산구 페이스갤러리에서 놀랜드의 1960년대 작품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에 대표작 11점...
대학 시절, 어느 시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해방 후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던 부모 세대의 경험.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빨치산이 장악했던 시골 마을. 늦은 밤에 자고 있으면, 갑자기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고 손전등을 비춘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며 바라보지만, 불빛 때문에 누구인지 제대로 식별할 수 없다. 그가 묻는다. “너 어느 편이야?” 물어보는 이가 국군인지, 빨치산인지 알 수 없기에 제대로 답할 수가 없다. 반대쪽이라고 말하면, 바로 죽을 수도 있다. 말 한마디에 목숨이 걸린 상황. 가장 두려운 공포 아닐까.지난달 31일 개봉한 <시빌 워: 분열의 시대>에서, 그 시절 기억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만났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가상의 내전이 벌어진 상황을 그린다. 남북전쟁 당시처럼 주들이 나뉘어 싸우는 미국 전역은 수시로 총격전이 벌어지는 전장이다. 베테랑 종군기자인 리와 초보 기자인 제시 등은 워싱턴에 고립된 대통령을 인터뷰하기 위해 위험한 여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