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폰테크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2일 “현 상황에서 경기 회복을 위한 부양책이 시급한 것이 분명하지만, 급하다고 경기부양책에만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사후적으로 더 큰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총재는 이날 서울 남대문로 한은에서 열린 창립 75주년 기념식에서 “성장잠재력의 지속적인 하락을 막고 경기변동에 강건한 경제구조를 구축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며 경기부양책과 함께 구조개혁을 주문했다.
이 총재가 구조개혁을 강조하는 이유는 저출생·고령화 등으로 잠재성장률이 2%를 밑도는 데다 높은 대외 의존도와 일부 산업에 집중된 수출 구조로 대외충격에 취약한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이 총재는 당분간 기준금리 인하 기조를 유지하겠다면서도 과도한 인하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그는 “기준금리를 과도하게 낮추면 실물경기 회복보다 수도권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며 “손쉽게 경기를 부양하려고 부동산 과잉투자를 용인해온 과거의 관행을 떨쳐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원·달러 환율이 1300원대 중반 수준으로 낮아졌으나 미 연방준비제도의 금리인하 속도조절에 따라 내외금리 차가 더 커질 수 있고 주요국 무역협상 결과 등과 관련한 불확실성이 높아 외환시장 변동성도 다시 확대될 수 있다”고 했다.
이 총재는 “구조개혁은 항상 이해관계의 충돌을 피할 수 없으며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승자와 패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새 정부가 구조개혁 과제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리더십을 발휘해 당면한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인 원화 스테이블 코인 발행에 대해선 “원화 표시 스테이블 코인은 핀테크(금융기술) 산업의 혁신에 기여하면서도 법정화폐의 대체 기능이 있는 만큼, 안정성과 유용성을 갖추는 동시에 외환시장 규제를 우회하지 않도록 제도적 방안을 마련해 관계 기관과 긴밀히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는 한은의 조직문화가 더 수평적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그는 “저는 취임 직후 창립기념사에서 ‘계급장을 떼고 할 말은 하자’는 조직문화를 만들자고 강조했다”며 “‘시끄러운 한은’을 향한 변화에 분명 진전이 있었지만, 여전히 ‘총재님 말씀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하는 직원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돌봄보다 가사업무가 많아체류불안·저임금 등 호소
서울시와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시행한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으로 국내에 들어온 필리핀 돌봄노동자들이 불안정한 체류 자격과 과도한 가사 업무, 저임금, 불안정한 노동시간 등 문제를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의회와 이주가사돌봄연대는 12일 ‘국제 가사노동자의날’ 토론회를 열고 지난해 9월부터 올해 2월까지 시행된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에 참여한 필리핀 노동자 21명에 대한 심층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참여자들은 체류 불안정성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이들은 비전문인력 이주노동자 채용을 위한 고용허가제 비자(E-9)로 입국했다. 노동부는 외국인 가사관리사의 비자가 3년까지 연장된다고 했는데, 이는 다른 고용허가제 노동자(4년10개월)보다 짧은 기간이다. 이마저도 실제 연장기한은 3개월~1년에 그쳤다. 이들은 “업체가 비자로 위협한다” “추방될까봐 두려웠다”고 했다.
아동 돌봄전문가로 입국했으나 실제론 가사 업무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필리핀 돌봄노동자 A씨는 “고객 두 명 중 한 명의 집에서만 케어기버(돌봄제공자)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B씨는 “온 집을 청소한 다음에야 아이들을 돌볼 수 있다”고 했다. C씨는 “계약을 맺을 때는 아이돌봄 계약에 사인했지만 지금까지 아이를 하나도 돌보지 않았다”고 했다.
임금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저시급을 적용받지만 주거비, 보험, 휴대폰비, 소득세 등을 공제한 실수령액은 90만~130만원에 그쳤다. D씨의 경우 주 36시간 근무 기준 최저임금, 연차수당, 주휴수당을 합친 월급은 180만원이지만 실수령액은 100만원이었다.
반면 업무는 명확한 경계 없이 확장됐다. 일부 노동자는 고용주 가족의 친척집까지 가서 청소를 하고, 아이들 영어교육을 지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가 자는 동안 부모와 영어 회화를 계속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추행, 성희롱 피해 증언도 나왔다.
이미애 서울대 아시아이주센터 공동연구원은 “필리핀 돌봄노동자들의 문제는 개별 사례가 아닌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것”이라며 “체류 안정성 보장, 노동권 강화, 양질의 돌봄 일자리 창출을 통한 지속 가능한 돌봄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