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정 검찰총장(54·사법연수원 26기)이 1일 사의를 표명했다. 지난해 9월 윤석열 정부 두 번째 검찰총장으로 취임한 지 9개월여 만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다른 검찰 고위간부들도 이날 잇따라 사의를 표명했다. 법무부는 이날 이재명 정부 첫 검찰 고위간부 인사를 전격 단행했다.
심 총장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검찰총장의 무거운 책무를 내려놓는다”며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지금 직을 내려놓는 것이 마지막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심 총장은 전날 법무부에 사직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퇴임식은 2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열린다.
고검장·검사장급 간부들도 잇따라 사의를 밝혔다. ‘검찰 2인자’인 이진동 대검 차장(57·28기), 신응석 서울남부지검장(53·28기), 양석조 서울동부지검장(52·29기), 변필건 법무부 기획조정실장(50·30기) 등이다. 이들은 모두 윤석열 정부에서 검사장이나 고검장으로 승진했다. 이진수 법무부 차관(51·29기)은 전날 취임 후 이들에게 인사를 예고하는 전화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심 총장은 사직하면서 이재명 정부의 수사·기소권 분리 등 검찰개혁 방안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심 총장은 “시한과 결론을 정해놓고 추진될 경우 예상하지 못한 많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며 “학계, 실무계 전문가 등 다양한 의견을 충분히 듣고 심도 깊은 논의를 거쳐 국민을 위한 형사사법제도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양 지검장도 이날 검찰내부망에 “사법기관 간 책임의 영역이 더욱 흐려지고, 범죄 피해자인 국민은 제3의 권력기관을 찾아 나서거나 스스로 해결을 시도하는 사회적 혼란상태가 우려된다”고 썼다.
앞서 이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자신과 가까운 5선 중진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내정하고, 대통령실 민정수석엔 대검 차장을 지낸 대표적인 검찰 기획통 출신 봉욱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를 임명하면서 검찰개혁을 추진할 진용을 갖췄다. 정 내정자는 이날 “수사와 기소의 분리, 검찰의 집중된 권한 재배분과 관련해서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이날 곧바로 고위 간부 인사를 단행했다. 신임 법무부 검찰국장에는 성상헌 대전지검장을, 기획조정실장에 최지석 서울고검 감찰부장을 임명한다고 밝혔다. 대검 차장에는 노만석 대검 마약·조직범죄부장을, 서울중앙지검장에는 정진우 서울북부지검장을 임명했다. 서울동부지검장에는 임은정 대전지검 부장검사를, 서울남부지검장에는 김태훈 서울고검 검사를 각각 임명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역할인 국정기획위원회도 두 차례 대검 업무보고를 취소하면서 검찰에 이 대통령 공약 이행방안 마련을 압박하고 있다. 국정기획위는 2일로 잡아뒀던 세 번째 업무보고 일정도 검찰 지휘부 공백을 이유로 무기한 연기했다.
심 총장 등의 사의 표명은 이런 분위기 속에 나왔다. 새 법무부 장관 취임 후 검찰총장을 비롯한 검찰 고위직 물갈이 인사가 마무리되면 검찰개혁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전북 전주시 한옥마을 길목, 옛 도지사 관사였던 하얀양옥집이 개관 1주년을 맞았다.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이곳은 지난 1년간 8만명이 찾으며 조용한 변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전북도는 1일 전주시 풍남동 하얀양옥집에서 개관 1주년을 기념하는 ‘홈커밍데이’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지역 예술인과 시민 등 50여 명이 함께했다.
하얀양옥집은 1971년 전북은행장 관사로 지어졌고, 1976년부터는 전북도 부지사와 도지사 관사로 사용됐다. 공간 전환의 시작은 2022년 7월 취임한 김관영 지사의 관사 폐지 선언이었다. 김 지사는 “도민께 돌려드리는 것이 도리”라며 관사를 비우고 전세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그렇게 시작된 변신은 ‘누구든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집’이라는 슬로건 아래 도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이어졌다. 2024년 5월 문을 연 하얀양옥집은 전시·공연 등 생활 속 예술이 펼쳐지는 열린 공간으로 운영돼왔다.
이 공간의 가장 큰 특징은 ‘전문가의 예술’이 아니라 ‘생활 속 예술’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다. 완주 화정마을 할머니의 꽃 그림, 아이들의 그림일기, 청년 예술인의 첫 연주 등이 관람객의 공감을 이끌었다. SNS에는 “우리 엄마 전시 중입니다”, “내 아이 작품이 걸렸다”는 해시태그가 줄을 이었다.
김 지사는 “하얀양옥집은 공간을 돌려드린다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전북의 문화철학을 담은 상징”이라며 “문화가 일상이 되는 전북을 도민과 함께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개관 이후 누적 방문객은 약 7만8000명. 지난해 5월부터 12월까지 3만7420명, 올해 상반기에는 4만1050명이 다녀갔다. 하루 평균 평일 189명, 주말 543명이 이 공간을 찾고 있다.
1주년을 맞아 하얀양옥집은 또 다른 전시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날부터 36일간 열리는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지’ 전시는 발달장애 예술인의 감성을 담은 회화전이다. 이 밖에도 일본 가나자와 공예전,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추모전, 인구소멸지역 주민 참여 전시 등도 차례로 열릴 예정이다.
오는 토요일, 어머니와 함께 요양원에 계시는 집안 어르신 한 분을 찾아뵙기로 했다. 평생 활달했으나 아흔을 훌쩍 넘겼으니 기력은 예전만 못하실 게 분명하다. 치매나 알츠하이머는 없다지만, 기억도 그때만 못하실 것은 불문가지. 특별히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으니 공동의 기억 역시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짧은 면회 시간에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벌써 머리가 하얗다. 그래도 피붙이니 두어 가지 이야깃거리는 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토요일을 기다린다.
한 사람은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는 법인데, 그렇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그이가 걸어온 길의 흔적을 따라 잊었던 기억들을 되찾으며, 때론 안도했고 종종 행복했다. 절판되어 아쉬운 책 목록 중 단연 앞자리에 놓아둔,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노 가이거의 <유배 중인 나의 왕>은 알츠하이머로 삶의 희망을 놓아버린 아버지를 곁에서 살펴본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아버지는 열일곱 나이에 나치에 징집돼 아비규환 전쟁을 겪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꿈 많던 소년이 아니었다. 까칠함과 괴팍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으니 자식들조차 아버지의 적잖은 변화가 알츠하이머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병은 아버지에게 ‘교묘히 눈에 띄지 않게’ 그물을 던졌다.
아버지는 “번번이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빼앗아가거나 훔쳐갔다”고 역정을 냈다. 집착도 심했다. 집 앞 자작나무가 잘 있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 물었고, 때론 저 나무가 집을 덮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평생 살아온 집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도 적잖았다.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모든 사람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부모님이 강인하고 삶이 무엇을 요구하든 의연하게 버틸 거라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님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다.”
2015년 영화 <스틸 앨리스>의 주인공 앨리스(줄리언 무어)는 세 아이의 엄마, 사랑받는 아내, 존경받는 교수였다. 하지만 행복한 앨리스 앞에 깊은 어둠이 드리웠다. 건망증이 부쩍 심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 앞에 닥친 현실은 막막 그 자체, 조발성 알츠하이머였다. 하필 그의 전공은 언어학이었다. 말과 글이 앨리스의 전부였는데, 서서히 그 전부가 어눌해지고 기억이 희미해졌다. 어떤 철학자가 주장한 ‘내가 기억하는 나가 곧 자아’라는 말이 맞다면, 앨리스는 자아가 희미해지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그 철학자의 말을 거부한다. 기억을 잃어가고 있지만 ‘지금이 내가 나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 거야’라며 마음을 다잡는다. 현실을 애써 부정하던 남편, 발병 초반에는 갈등했지만 엄마의 변화를 누구보다 따뜻하게 품어내는 큰딸 등 가족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래야 함을 상기시킨다. 영화의 원작은 알츠하이머를 연구하는 신경과학자이자 소설가인 리사 제노바의 동명 소설인데, ‘품절 상태’라 독자들의 손에 들릴 수 없어 안타깝다.
옛말에 마을이 한 아이를 키운다고 했다. 아이뿐이었을까. 그 옛날에도 적지 않았을 치매 노인들을 보듬은 것 역시 마을이었다. 기억을 잃었을 뿐,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 바로 그이 아니던가. 과학기술이 날로 발달해 우리 후손들은 ‘실리콘 형태의 뇌’, 즉 디지털 매체로 영원히 기억을 잃지 않을 거라고 한다. 혼자서 걱정한다. 그 기억은 나, 아니 나의 자아일까. 곁을 내어주던 그 사람들이 없는데, 사라지지 않는 기억은 대체 무슨 소용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