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테크 이용전확인사항 담장의 능소화가 바닥으로 흐른다. 먼 산은 봄 단풍 블라우스를 벗고 진초록 패딩으로 갈아입었다. 반복되는 변화지만 늘 새롭다. 자연에 반해 시골로 오는 사람들이 있다. 15년 전 나도 그랬다. 지켜보면 늘 곱기만 하던 자연이지만 더불어 살다 보니 좀 달랐다.
벼농사는 모내기 두 달 전 볍씨를 물에 담그는 것으로 시작한다. 모판이 못자리에서 자라는 동안 메뚜기 이마보다 빤지르르하게 논두렁을 깎는다. 논을 갈아엎고, 흙을 잘게 부수고, 물을 쏟아붓고 진흙을 만들어 화투판 담요처럼 빤빤하게 펼쳐야 한다. 거기에 약 10㎝ 깊이로 물 높이를 유지하며 새는 곳을 찾아 미장하듯 손으로 처발라도 물은 꾸준히 샌다. 기계가 작업하기 편하도록 물을 뺐다가 이앙기가 6줄로 예쁘게 똥을 싸듯 모를 꽂으며 돌아다니면 모내기가 끝난다. 그리고 바로 물을 다시 대고 풀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사실 모든 작업이 자연에 반(反)하는 과정이다.
농사라는 게 하나하나 사람 손이 가야 하고, 어울려 자라는 것들을 가르고 구분해 놓는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건 곡식이나 채소라고 부르고, 도움이 안 되는 건 죄다 앞에 잡(雜)자를 붙인다. 잡초, 잡목, 잡새, 잡놈. 판단의 기준이 지나치게 인간적이다. 어느 인터넷 판매 사이트에 올라온 ‘동물복지 인증을 받아 풍부한 육즙과 담백한 풍미가 일품’이라는 축산업체의 홍보 문구는 살짝 현기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복지와 육즙의 관계라니. 자연퇴비로 이용하려고 지난가을 논에 풀씨를 뿌렸던 자운영과 헤어리베치를 만발한 꽃이 무안하게 갈아엎었다. 바깥쪽부터 달팽이 꼴로 트랙터를 움직이며 풀과 흙을 섞었다. 점점 줄어들어 얼마 안 남은 꽃 더미 위로 나비가 밀도를 높였다. 언뜻 축제 같아 보였지만 실상은 아비규환이다. 나비들은 끝내 터전을 잃고는 흩어졌다.
봄부터 농로를 안전한 곳이라고 여겼던 개구리들이 예초기 침탈에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방아깨비들도 난리 치며 날아다닌다. 어디서 본 장면 같다. 영화 <아바타>다. 나는 먹고살려고 남의 것 뺏으러 간 인류의 대표처럼 칼날을 휘저었고, 개구리와 곤충들은 영화의 나비족처럼 죽기 살기로 도망쳤다. 누군가의 보금자리를 사정없이 부쉈다.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나비족 편이었는데.
논두렁에 뚫어진 구멍은 없나 살피며 막고 때운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흐름을 막으려는 시도다. 논바닥에 벌써 한 뼘 크기로 자란 잡초를 째려보며 한숨과 저주를 쏟았다. 친환경 농사를 짓다 보니 제초제를 쓸 수는 없고, 야무지게 뽑고 갈아버릴 마음을 먹는다.
어제도 논일을 마치고 나와 어스름을 마주하며 장화를 벗는데 동네 K동생이 지나가다 인사했다. “뭐던데요!” 무엇하냐는 말이지만 의문문은 아니다. 옆에서 웽웽거리는 모기를 쫓으며 짜증을 냈다. “하느님은 이놈들을 왜 만들었다냐?” K는 가던 길 다시 가며 던지듯 말했다. “그 냥반이 형님도 만들었구마 뭘.”
그래. 사실 나의 존재도 친환경이 아닌걸. 신에게 대들던 건방을 접기로 한다. 뭘 그렇게 잘해보려 애쓰는지, 그러느라 헤집고 망가뜨리지 않았는지. 애초 안 온 듯 갈 수 있기를 바라며 흔적 없이 살기로 했잖은가. 정신 차리련다.
공영방송사 이사회 구성 등에 관한 방송 관련 3개 법 개정안 처리에 정부·여당이 속도를 조절하는 것 같다. 일부에선 집권 초가 아니면 정권이 못(안) 할 것이라며 반발한다. 그러나 그간 “알려졌다” 식의 보도로만 개정 내용이 흘러나올 뿐 공론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물론, 민주당이 법안을 내면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 법제사법위, 본회의 순으로 공개논의가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수 여당 안은 일사천리로 국회를 통과해 대통령 재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실도 요구했다는 “전문가 의견 수렴과 숙의”를 통해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유능한 리더십 제고에 도움 될 길을 다질 필요가 있다.
우선, 정당의 공영방송 이사 추천은 재고해야 한다. 정당 추천은 정치적 후견주의를 없애겠다는 개정 취지에 어긋난다. 국회보다 국민을 더 대표하는 게 있냐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우선순위로 치자면 공영방송 등 모든 공공 서비스를 책임지는 대통령이 먼저다. 다만, 방송 내용에 대한 권력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정부와 국회 모두 인사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알려진 바’로 정부는 아예 배제하고 여야 정당이 이사회의 절반가량을 나눈다는데, 이는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이다. 독일 헌법재판소는 2014년 공영방송 감독기구에 “국가 또는 국가에 가까운 대리인” 비중을 3분의 1로 제한하라고 판시한 바 있다. 여기에는 정당 추천 인사들도 포함된다.
역할과 지위가 다른 KBS 이사회와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에 같은 방식을 적용하려는 것 또한 재고해야 한다. KBS 이사회는 이 방송사의 최고의결기관이며 사장, 보도본부장, 경영본부장 등은 이사가 아닌 집행기관이다. 이와 달리 MBC 사장, 보도본부장 등은 자사 이사들로서 많은 주요 사항을 스스로 결정하고 집행한다. 방문진 이사회는 대주주 자격으로 MBC를 관리·감독하는 공공기관 방문진의 이사들이다. 경영하는 KBS 이사회에는 전문성이, 감독하는 방문진에는 사회 대표성이 더 요구된다. 이런 구분 없이 정당이나 시청자위원회, 법조·학술단체, 내부 임직원 등에게 추천권을 일률적으로 배분하려는 것은 편의적 접근이다. 어떤 미디어 사업체라도 대표성만을 기준으로 이사회를 구성한다면 치열한 경쟁 환경에서 뒤처져 뛰어가고 있는 셈이 될 것이다. 개정안에서 EBS의 경우만 사장 선임 등에서 방송통신위원회와 교육부의 관여를 유지한다는 것도 의아하다.
이번 개정안의 모델이라고 하는 독일의 경우, 공영방송 감독기관으로 사회적 다원성과 대표성을 강조하는 방송평의회와 경영 전문성을 강조하는 경영평의회를 따로 둔다. 편성을 감독하는 방송평의회는 정당, 시민단체 등 추천을 통해 많게는 60명으로 구성한다. 방송평의회가 경영·재정·인사를 담당하는 10명 내외 경영평의회 위원 대부분을 선발한다. 한국에서도 별도 공영방송 이사 선발위원회를 두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사회적 대표성으로 구성한 선발위원회가 경영, 편성, 기술, 법률 등 분야별 전문성을 고려해 공영방송 이사를 선발하는 방식이다. 영국 BBC도 이사회 구성에 선발위원회를 가동한다. KBS의 경우 BBC처럼 사장, 편성본부장 등도 이사회 구성원이 돼 함께 논의하는 구조도 고려해보자. 필요하다면 이렇게 선발된 이사들이 (BBC 사례처럼) 자발적으로 주요 정당과 소통을 위한 이사들을 추가로 뽑을 수도 있다.
예측 가능성 없이 급가속과 급감속을 반복하지 말고, 정부·여당이 명확한 시한을 제시한 뒤 공론과 숙의를 통해 방송법 개정안을 검토하자. 혹시나 시급성의 이유가 정권교체 후에도 문제적 인물이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길 바란다. 그 자체가 이번 개정 취지와 정반대인 공영방송의 권력 종속성을 뜻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