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구제 조현 외교부 장관 내정자가 24일 “북·미 대화가 잘 이륙하도록 해서 한반도에 평화가 정책되는 게 이재명 정부 외교·통일 정책의 우선순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조 내정자는 이날 오전 서울 광화문 인사청문준비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기자들과 만나 ‘정부가 북·미 대화를 어떻게 지원할지’를 묻는 말에 이렇게 말했다. 조 내정자는 이어 “외교부가 대통령의 철학에 맞춰 미국 또는 우방들과 긴밀히 협조해서 이를 추진하는 데 걸림돌이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남북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 북·미 대화를 남북관계 개선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고,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개선이 선순환하는 구조를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조 내정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를 상대로 동맹의 안정성과 실익을 어떻게 챙길지’를 묻는 말에는 “그거야말로 이재명 정부가 그간 표방해온 정책의 방향, 즉 실용외교를 통해 전략을 잘 짜서 차분하고 현명하게 해 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조 내정자는 취임 이후 가장 먼저 미국을 방문할지 여부를 두고는 “취임하면 미국부터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렇게(방미)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 내정자는 한·일관계를 두고 지난 18일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첫 정상회담을 언급하며 “한·일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면서 그 박스의 틀을 넘어서는 발전을 모색할 것”이라며 “그러나 문제가 있는 것들은 또 조용한 외교를 통해 해결해 나가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중·대러 외교 기조를 두고 “매우 조심스러운 이슈”라며 “중국과의 관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다른 중요한 사안들과 함께 콘텍스트에서 검토하고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조 내정자는 이재명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정상회의에 불참한 것을 두고는 “여러 가지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 최선의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조 내정자는 “국제정세가 매우 불안정한 상황에서 외교부 임무를 맡게 돼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라며 “이재명 정부, 국민주권정부가 이런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고 헤쳐나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외교부 직원들과 함께할 생각”이라고 했다.
말할 수 있는 빚이 있고, 말할 수 없는 빚이 있다. 말할 수 있는 빚은 ‘반은 은행 거야’라는 말로 자신의 집을 소개하거나, 운영에 부침을 겪는 업주가 희망을 찾을 때의 것이다. 겸손하고, 성실하고, 명예롭다. 반면 말할 수 없는 빚은 말해진 적 없기에 예를 들 수가 없다. 생존이나 중독에서 기인했을 것이라 짐작할 뿐. 숨기고 감추느라 어둠 속에서 축축해진 그것들의 이미지는 오만하고, 나태하고, 굴욕적이다.
말할 수 없는 빚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나는 지극히 사적인 채무에 대해서만 말하자고 다짐했다. 병든 몸으로 여러 직장을 전전하며 얻은 괴로운 부채, 이자를 갚기 위해 다시 빚을 내야 했던 슬픈 밤, 빚을 갚으며 많은 사람들이 내게 내어준 손과 품 같은 것을. 내게 빚은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수치스러운 절망이었고, 그 고립된 언어로 나는 나 자신을 회복시키는 글을 쓰고자 했다.
그러나 나의 부채감이 내가 속한 사회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글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국회 앞에 장갑차가 등장했던 어느 겨울 이후의 글쓰기는 더더욱 그랬다.
악보다 위선이 더 나쁜 것이라 외치는 이들의 폭주에 어떤 상황에서도 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맞섰다. 그 싸움판 안에서 나는 채무자일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부채를 안기는 대부업자가 되기도, 누군가에겐 빚을 갚으라 고함치는 추심업자가 되기도 했다.
빚에도 얼굴이 있다면
어떤 빚은 종종 죄로 환원된다. 사람들은 대개 빚을 지고 갚지 못하는 이들의 사정을 공적인 문제로 확대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 질병과 사고로 인해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중독과 탈선으로 스스로 삶을 망가뜨린 사람들은 빚을 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쉽게 무능하고 방탕한 존재가 된다.
세상은 이들의 고통을 당연한 불행으로 여기고, 이들의 실패는 개인의 불찰로 축소하여 재기의 기회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최근 정부는 113만명의 장기 연체 채무를 탕감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상환 능력을 상실한 장기 연체자의 빚을 전액 탕감하고, 자영업자에겐 원금의 90%까지 감면하는 방안이다. 정책의 내용이 알려지자 곧바로 반발이 일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주장, 채무에 관한 도덕적 해이를 조장한다는 비난, 빚 갚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세상이라는 푸념까지. 낯설지 않았다.
정부의 탕감 조건은 ‘연체 기록 7년 이상, 연체 금액 5000만원 이하의 회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채무’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성실히 갚은 사람에 대한 배신’이라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경제적 취약계층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채무조정은 이미 빚을 갚은 이들에게 상실감을 주거나 공정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채무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는 언제든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채무의 고통을, 죄가 아닌 상황으로 규정하며 재기의 가능성을 만드는 최소한의 방안이다.
일기의 마지막 장
“대출금을 갚았어요. 신용점수가 올랐는지 확인하세요!” 병실에 앉아 금융 앱에서 보낸 메시지를 읽는다. 명랑한 메신저 알림음은 이자만큼 늘어나던 삶의 무게를 가볍게 비웃는다. 제일 힘들었을 때는 잠만 자고 싶었다. 말없이 잠들고, 가능하면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땐, 그 감정들을 언어로 옮기고 싶었다. 나의 슬픔과 억울함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글을 쓰는 동안엔 부채만 늘었다. 글을 연재하는 내내 마감을 제때 지키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기한을 멋대로 어기며 죄송하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빚을 진 경험을 쓰면서 동시에 빚을 지는 나는 얼마나 오만하고 나태하며 굴욕적인가. 어떤 문장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병이 재발하는 기분이었다. 채무를 쓴다는 게 나를 회복시키기는커녕 더욱 고립시키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을 결코 멈추지 못했다. 의무감이나 책임감 때문이 아니라, 일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자괴감, 더 나아갈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그 두 개의 감정은 마치 채무의 고통과 같았다. 자괴감과 무력감에서 동력을 얻다니, 어쩌면 나는 채무의 고통에 중독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이 끝없이 빚을 지고 갚는 과정이라면,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고통에 적응해야 하고 그 불완전한 상태를 긍정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악담을 써서 건넨다. 부디 당신에게도 채무가, 채무의 고통이 찾아들기를. 고통과 삶을 단단하게 묶어줄 빚이 찾아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