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폰테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아궁이에 걸린 밥 솥…한강변 고구려군은 속절없이 전멸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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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125.♡.130.40) | 작성일 | 25-06-18 23:54 | ||
당일폰테크 1977년 7월이었다. 해발 53m의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던 서울 구의동 유적의 발굴 현장 설명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발굴은 학술조사가 아니었다. 강 건너는 잠실지구, 강 이쪽은 화양지구 개발이 이뤄지면서 한강 본·지류를 정비하고, 택지 등을 조성하기 위한 실시된 구제발굴이었다. 약 3000평에 이르는 구릉은 벌써 절해고도로 변해 있었다. 주변은 개발 계획에 따라 공사가 이미 진행 중이었다. 이 구릉을 깎아내야 거기서 얻은 흙을 택지개발에 사용할 수 있었고, 또 평지로 변한 이 주변 또한 아파트 단지로 조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부터 ‘말무덤’ ‘장군총’ 등으로 구전되었던 구릉을 그냥 뭉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빈전이야 빈전!’ 현장설명회에서 당시 김원룡 발굴단장(서울대 교수)이 ‘한말씀’ 던졌다. “이 구릉은 빈전(殯殿·장례까지 왕·왕비의 관을 모신 전각)…가운데 관을 넣고 가옥을 세운 뒤 출입문을 단 영혼의 생가입니다.” 그는 “백제가 3년상을 치른다”는 <주서> 등 중국 역사서의 기사를 근거로 댔다. “이 구의동 유구는 3년상이 끝나자 불사른 임시 가묘이고, 그 위에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든 것”이라는게 김교수의 결론이었다. 선입견을 가질만 했다. 구릉이 예부터 무덤으로 구전되지 않았던가. 게다가 무령왕릉(1971년 발굴)에서도 “왕과 왕비의 3년상을 치렀다”고 쓴 지석이 출토된 바 있다. 또 유구의 중심부에 관곽을 넣은 것 같은 구덩이가 보였고, 무덤의 호석으로 여길만한 석축이 둘러쌓여 있었다. 유구는 무덤의 봉토처럼 보였다. 철제 무기류와 농공기구, 가락바퀴, 도기류 등의 출토품도 고분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일부 현장 조사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까. 고분이 맞을까. 구릉의 정상부라면 오히려 군사요새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화살촉을 포함, 출토된 3000여점의 철제 무기가 그 증거 아닐까. 또 원형 구덩이 속에 조성된 온돌 시설은 사람이 상주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나 현장 조사원들은 누구도 하늘 같은 스승의 견해에 토를 달지 못했다. 그해(1977년) 9월 조사가 끝났다. 구릉은 평지가 되어 아파트 단지(자양 한양아파트) 및 주변의 시설로 변모했다. ■형(고구려)을 형(고구려)으로… 11년이 지난 1988년 겨울이었다. 한창 조사중이던 몽촌토성 출토 도기(토기)를 밤새 복원하던 최종택 서울대 박물관 미술사(현 고려대 교수)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조각을 붙여보니 전형적인 고구려 도기인 ‘광구장경사이옹(廣口長頸四耳甕·입이 넓고 목이 길며 손잡이가 네 개 달린 항아리)’이었다. 중국 지안(集安)에서 흔히 출토되는 5세기 고구려의 지표 유물이다. 최종택 미술사의 눈이 번쩍였다. 몽촌토성에서 이 ‘광구장경사이옹’과 함께 출토되는 ‘장동호(몸체가 긴 항아리)’ 등의 도기가 1977년 구의동에서 나온 것과 흡사했다. 표면이 흑색·흑회색·황갈색 등이며, 태토(도기의 밑감이 되는 흙)는 고운 진흙으로 되어 있다. 항아리 몸체에 진흙 덩어리 모양의 독특한 보강재가 첨가된게 특징이다. 한마디로 ‘구의동과 몽촌토성’ 출토 도기는 전형적인 고구려 제품이었다. 하지만 ‘구의동 유적=백제 고분’이라는 스승(김원룡 교수)의 견해를 정면으로 뒤집을 수 없었다. 결국 당시 최종택 미술사와, 박순발 서울대박물관 조교(충남대 명예교수) 등이 나섰다. 둘은 이듬해(1989년) 2월 서울대 박물관에서 열린 몽촌토성 발굴유물 전시회에 참석한 스승(김원룡 교수)에게 “고구려 토기가 맞는 것 같다”고 운을 뗐다. 둘은 조마조마 했다. 혹시 스승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까 해서…. 그러나 뜻밖이었다. 스승의 말씀엔 ‘쿨 내’가 진동했다. “맞는 것 같아. 이제부턴 고구려 토기라 하지.” 그 뿐이 아니었다. 그 해(1989년) 이어진 몽촌토성 서남지구 발굴에서 고구려 도기편과 함께, 구의동 유적에서 확인된 것과 비슷한 고구려 온돌유구가 노출됐다. 이제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의동 보루(강북)와 몽촌토성(강남)에 고구려 유적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아궁이에 올려놓은 솥과 주전자 그런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구의동 보루에 드라마틱한 6세기 역사의 ‘스틸컷’이 담겨있다. 즉 해발 53m의 구릉 정상부에 조성된 유적은 원형의 성벽을 쌓고 내부에 주거 시설을 설치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 내부에 온돌이 조성되어 있었고 바닥의 일부에 벽돌이 깔려 있었다. 온돌의 남쪽 아궁이에 쇠솥(鐵釜)과 쇠주전자(鐵壺)가 걸려있었다. 그 주변에는 19개 기종 369개체의 도기와, 창·칼·도끼·화살촉 등 무기, 철삽·쇠스랑·호미·끌·낫·가래 등 농공기류 등 철기(화살촉 3000여점+15개 기종 50여 점)가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전소된 흔적이 완연했다. 불을 서둘러 끄려던 진화의 흔적도 없었다. 불에 타고 난 뒤 흙으로 덮은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구의동 보루는 적의 기습 공격을 받고 손쓸 틈도 없이 전멸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아궁이에 올려놓은채 확인된 솥과 주전자가 그 위급 상황을 웅변해준다. ■격동의 5~6세기 언제의 일일까. 격동의 4~6세기로 시간을 돌려보자. 백제와의 패권 다툼에서 줄곧 열세를 보였던 고구려는 396년(광개토대왕 5) 백제의 58성 700촌을 빼앗는다.(백제 아신왕 5) 백제는 이때 “고구려왕의 영원한 노객이 되겠노라”(<광개토대왕비문>)고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재위 391~413)의 뒤를 이은 장수왕(413~491)은 예서 만족하지 않는다. 장수왕은 증조할아버지(고국원왕·331~371)가 백제 근초고왕(346~375)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427년 평양성으로 천도한 장수왕은 본격적인 남하정책을 편다. 장수왕은 국세가 한풀 꺾인 백제를 괴롭힌 끝에 마침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킨다.(475) 고구려군의 남하 루트 상(임진강~파주 적성~양주~서울)에는 고구려가 조성한 보루가 점점이 박혀 있다. 그중 한강 유역의 고구려 보루 가운데 가장 끝부분에 설치된 곳이 바로 ‘구의동 보루’다. 구의동 보루 발굴 이후 특히 한강 유역, 그 중에서도 아차산·용마산 능선과, 그곳에서 뻗어간 산줄기에 줄지어 조성한 고구려 보루(20여곳)가 줄줄이 확인됐다. 그중 아차산 정상부에서 확인된 아차산 4보루(해발 286m·1997~98)를 시작으로 아차산 시루봉(206m·1999~2000)-홍련봉 1보루(125m·2004)-홍련봉 2보루(126m·2005)-아차산 3보루(296m·2005)-용마산 2보루(230m·2005~06) 조사가 이어졌다. ■551년의 기습과 전멸 조사 결과 한강 유역의 고구려 보루의 설치 시기를 두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연대의 틀은 475년(고구려의 한성 함락)~551년(백제군의 한강유역 차지) 사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 중 구의동 보루의 성격을 처음으로 규명한 최종택 교수(현 고려대)의 견해를 중심으로 <삼국사기> 기록과 맞춰보며 살펴보자. 즉 475년 백제의 한성을 공격한 고구려군은 북성(풍납토성)과 남성(몽촌토성)을 차례로 함락시킨다. 백제 개로왕(455~475)은 아차산성까지 끌려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475~477)은 웅진(공주)으로 천도한다. 이로써 한성 백제 시대는 막을 내린다. 한성 공략을 성공리에 마친 고구려 장수왕은 귀국한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몽촌토성에 주둔하면서 백제군이 퇴각한 웅진(공주) 방면으로 계속 남하한다. 하지만 백제는 무령왕(501~523) 즉위 무렵부터 전력을 재정비한다. 그러자 고구려군은 한강 이북으로 철수하여 아차산·용마산 일대에 보루를 세워 교두보로 삼는다. 그러다 50여년이 지난 551년 한강 유역이 나·제 연합군의 기습공격을 받는다. <삼국사기> ‘열전·거칠부’는 “동맹을 맺은 백제가 평양(현재의 서울 강북)을 빼앗자 (신라도) 고구려의 10군을 접수했다”고 전했다. <일본서기>는 “551년 백제 성왕이 나·제 연합군을 이끌고 한성을 비롯, 옛 땅 6군을 회복했다”(‘흠명천황’조)고 기록했다. 1977년 확인된 구의동 보루의 ‘스틸컷’은 바로 551년 백제 성왕이 이끈 연합군의 기습공격, 바로 그 순간을 가리킨다. 솥과 주전자를 아궁이에 걸어놓고 밥을 해먹으려던 고구려군 병사들은 창졸간에 백제군의 기습을 받고 전멸했을 것이다. ■창 10점의 깊은 뜻 이어진 아차산·용마산 보루군의 출토양상에서 드라마틱한 현상을 읽을 수 있었다. 아차산·용마산 보루에서는 구의동에서 3000여 점이나 남아있던 화살촉이라든가, 창, 칼 등이 적었다. 무엇보다 밥을 짓는 솥과 주전자 등이 구의동 보루에서처럼 아궁이에 걸려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이런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 한강에 바로 붙어있는 구의동 보루는 손 쓸 틈도 없이 전멸되었지만 그보다 2~5㎞ 떨어진 홍련봉~아차산 4보루에 주둔한 고구려군은 그렇지 않았다. 구의동 보루의 참변을 목격하고 무기와 취사도구 등을 수습하고 안전하게 철수했다. 그런데 구의동 주둔군의 전멸은 고구려군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고고학적으로는 ‘폐기의 동시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즉 그곳에서 1400여년 동안 누구도 손도 타지않고 고스란히 확인된 무기를 통해 보루 주둔 병사들의 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구의동 보루에서는 3000여 점의 화살촉과 창 10점, 외날도끼 4점, 칼(대도) 2점, 작은 칼(도자) 3점 등의 무기가 확인됐다. 당시 군인의 대표적인 개인무기는 창이었다. 구의동 보루에는 10명 안팎의 병사가 주둔했다는 얘기가 된다. 휴대무기는 근거리 전투에 효과적인 창 만 있지 않았다. 원거리 전투에 필요한 활도 갖고 있어야 했다. <구당서> 등은 “고구려인들은 밤낮으로 활쏘기를 배웠다”고 전했다. 고구려 벽화(무용총·덕흥리 고분 등)에서 보듯 ‘말 타고 되돌아쏘기(파르티안 샷) 신공’ 등 활쏘기는 기본기 중의 기본기였다. 그렇다면 구의동 병사들은 개인당 창 1점과, 활과 화살 300발을 기본 개인화기로 휴대했을 것이다. 칼과 도끼는 보조무기였을 것이다. 이들은 원거리 전투엔 궁술로, 근접전엔 창과 칼로 적군과 맞서 싸웠을 것이다. ■아차산 4보루엔 100명 주둔 아차산 능선의 최북단(286m)에 구축한 아차산 4보루에서는 13기의 온돌이 확인됐다. 그런데 다른 유구보다 1.5m 가량 높이 축조된 1호 건물터에서는 온돌 2기와 함께 ‘지도형(支都兄)’ 명 접시 및 철제 투구 등 철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 건물은 지휘관용 숙소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차산 4보루의 온돌방 규모는 13~16평 정도이다. 구의동 보루의 온돌방(14평)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어떨까. 구의동 보루에서처럼 온돌 1기에 10명 안팎이 살았다면 아차산 4보루의 주둔군 수는 100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신당서>(‘병지’)는 “부대의 최소단위인 ‘화(火)’는 10명, ‘대(隊)’는 ‘화’를 5개 합친 50명…”이라 했다. 구의동엔 ‘1개 화(火·10명)’, 아차산 4보루에는 ‘2개 대(隊·100명)’가 각각 주둔했다는 얘기다. ■구절판=지휘관의 식판 각 보루에서는 다양한 고구려 그릇, 접시, 뚜껑, 종지류가 확인되었다. 병사들의 개인 식기로 추정된다. 그중에는 5종류의 반찬을 담을 수 있는 아차산 4보루 출토 구절판(실제로는 5절판)이 눈길을 끈다. 확인된 구절판은 5개체분 정도된다. 그런데 아차산 4보루는 앞서 언급했듯이 ‘지도형’ 명 접시는 물론, ‘후부도□형(後部都□兄)’과 ‘염모형(苒牟兄)’, ‘하관(下官)’ 등의 명문이 새겨진 식기가 확인된 곳이다. 이중 ‘후부’는 고구려의 평양천도 이후 귀족들이 살았던 오부(五部)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아차산에 이 오부 중 ‘후부’ 소속인 ‘도□형’이라는 귀족이 지휘관으로 파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형(兄)’자 돌림은 인명일 수도, 관등명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구절판은 이 보루의 지휘관급 식판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이 구절판의 바깥 바닥면에 새겨진 ‘대(大)’자는 바로 “내 식판이니까 건들지마”라는 식별문자일 가능성이 짙다. 개인식기에는 각 병사들이 직접 새긴 ‘글자 및 부호’(井, 大, 小, 工, 卍 등)가 다수 확인됐다. 그렇다면 당대 고구려 병사들이 자기 식기에 손쉽게 한자를 새겨 넣을만큼 공부를 했다는 말인가. 그랬다. <구당서> <신당서> 등은 “책을 좋아한 고구려인의 미혼자제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경당에서 주야로 독서한다”(‘동이열전’)고 했다. 아무리 돈없고, ‘빽’이 없어서 최전방으로 징집된 고구려 병사였지만 개인식기에 한자 한글자 쓰는 것은 시쳇말로 ‘껌’이었을 것이다. ■떡이 비상전투 식량? 또 흥미로운 유물이 바로 각 보루에서 빠짐없이 출토된 시루이다. 이는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대량 배식을 위해 쌀을 쪄서 밥을 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장거리 행군 및 훈련이나 전투 상황에서는 아예 떡으로 만들어 전투식량처럼 지니고 다니면서 먹었을 수도 있다. 떡을 만들면 조직이 치밀해져서 부피가 줄어들기 때문에 휴대가 간편하다는 장점도 있다. 게다가 시루떡 같은 ‘찐 떡’과 인절미를 비롯한 ‘친 떡’은 굳어진 상태에서도 불을 가하면 다시 먹을 수 있다. 실제로 <삼국유사> 등에 “신라 효소왕 연간(692~702)에 죽지랑이 부하를 위해 설병(舌餠·멥쌀 가루에 소금을 조금 섞어 그대로 쪄낸 백설기)을 갖고 떠났고”(‘열전 죽지랑’), “진표율사가 760년(경덕왕 19) 쌀 20말을 쪄서 말려 양식으로 삼아 전북 부안으로 갔다”(‘의해·진표전간’)는 기사가 보인다. ■군부대에 디딜방아? 구의동 및 아차산 등의 보루에서는 농공기구류가 빠짐없이 발굴되었다. 고구려군이 평상시에는 식량 조달을 위한 생산활동을 해왔다는 의미다. 즉 둔전(屯田)을 경작했다는 뜻이다. 고구려군은 쇠스랑과 보습, 삽날(가래), 호미 등으로 논밭을 갈고, 낫 등으로 곡물을 수확하고 잡초를 제거했다. 이와 관련해서 아차산 3·6보루에서 확인된 ‘디딜방앗간’과, ‘볼씨’(디딜방아나 물레방아의 쌀개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처럼 박아 놓은 나무나 돌)가 눈길을 끈다. 고구려 취사병이 ‘볏섬’ 상태의 군량을 직접 도정해서 밥을 지었다는 뜻이 된다. 또 각 보루에서는 어망추가 확인되었다. 이것은 고구려군이 때때로 한강이나 중랑천 등에서 물고기를 잡았다는 의미가 된다. 각 보루에서 확인되는 가락바퀴(방추차)도 흥미롭다. 가락바퀴는 물레로 실을 지을 때 사용하는 가락에 끼워 회전을 돕는 부품이다. 고구려 병사들이 직접 군복을 수선하고, 부대 깃발을 만든 상황을 웅변해주고 있다. ■군시설에 기와건물? 지금까지 조사된 보루 가운데 홍련봉 1·2보루도 주목을 끈다. 홍련봉 1보루는 구의동 보루와 가장 가깝고, 아차산 줄기의 남쪽 끝자락의 독립구릉 정상부(해발 125m)에 자리잡고 있다. 비교적 낮은 곳에 있고 접근이 쉬운 편이다. 그런데 이 보루에서 연화문 와당 6점을 비롯, 각종 기와가 다량 확인됐다. <구당서> 등은 “고구려에서는 왕궁과 관청, 사찰, 사당 등에만 기와를 쓴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홍련봉 1보루에는 군사시설과 함께 대민(對民)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관청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홍련봉 1보루와 150m 정도 떨어진 홍련봉 2보루에서도 흥미로운 유물이 확인되었다. ‘경자(庚子·520년)’명 도기가 첫손으로 꼽힌다. 유적의 중심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유물이다. 또한 홍련봉 2보루에서는 ‘관옹(官瓮·관청에서 쓰는 항아리)’ 명 도기와 함께 철기를 제작·수리할 때 단조(鍛造·금속을 두들겨 형태를 만듬)용 공구로 쓰인 집게가 확인됐다. 따라서 홍련봉 2보루는 군수물자의 생산과 수리 및 보급창고의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재건축 아파트촌이 구의동 보루 얼마전 필자는 구의동 보루를 없애고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 자양 한양아파트 단지와 그 인근 지역을 지나쳤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에 붙은 ‘아파트 재건축 사업’ 관련 플래카트가 눈에 띄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1983년 5월 준공된 조성된 아파트(6개동 444가구·12층)를 초고층(40층짜리) 아파트 단지로 재건축 추진중이라 한다. 계산해보니 벌써 42년이 흘렀다. 그곳에 구릉이 있었고, 그곳에 한강유역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던 고구려의 최전방 보루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이제 기억 너머로 사라져갈 판이다. 또 그곳에 백제군의 기습에 전멸당한 고구려 병사들의 ‘최후’, 그 순간이 서려있다는 것도…. 그러나 필자는 이렇게 다시 기록한다. 영영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면서….(이 기사를 위해 최종택 고려대 교수와 이정범 한국고고환경연구소 연구원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구의동 보고서 간행위원회, <한강유역의 고구려 요새-구의동 유적 발굴 조사 종합 보고서>, 1997 최종택, ‘남한의 고구려 유적’, <고구려 통사 8 고구려 고고-유적편>, 동북아역사재단, 2022 최종택, ‘발굴 고구려:한강유역의 고구려 보루’, <중원문화논총> 5권,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2001 이정범·하재령·조보람, <홍련봉 1·2보루>, 한국고고환경연구소, 2015 이정범·오현준, <홍련봉 1·2보루-제3차 발굴 조사 보고서>, 한국고고환경연구소, 2019 신광철, ‘고구려 남부 전선 주둔부대의 생활상-한강 유역의 고구려 보루를 통해서’, <고구려 발해연구> 38권, 고구려 발해학회, 2010 신광철, ‘고구려 남부전선 주둔부대의 편제와 위계:한강유역의 고구려 보루를 통해서’, <고고학> 9권1호, 중부고고학회, 2010 양시은, ‘아차산 고구려 보루의 구조 및 성격’, <고문화> 79권, 한국대학박물관협회, 2012 김원룡·임효재·박순발, <몽촌토성 동남지구 발굴조사보고서>, 서울대박물관, 1988 김원룡·최몽룡·박순발·최종택, <몽촌토성 서남지구 발굴조사보고서>, 서울대박물관, 1989 임효재·최종택·양성혁·윤상덕·장은정, <아차산 제4보루 발굴조사보고서>, 서울대박물관, 2010 송언석 의원이 16일 국민의힘 신임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대구·경북(TK)에 지역구를 둔 3선 의원으로 ‘범친윤계’로 분류된다. 윤석열 탄핵 대선의 민심을 성찰하고 당과 보수정치 쇄신을 감당해야 할 원내대표임을 감안하면 실망스럽다. 탄핵 정국 내내 윤석열을 비호하고, 대선 후보 교체 망동으로 당까지 망가뜨린 친윤이 다시 지휘부가 된 걸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겠는가. 당의 다수를 차지하고 기득권 유지 외에 어떤 것도 관심 밖인 친윤의 실력행사로까지 보인다. 이렇게까지 민심과 등질 수 있는지 개탄스럽다. 송 원내대표는 당선 소감에서 “변화와 쇄신이 필요하다”며 “과거로의 퇴행적 행위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고 미래만 보고 국민만 보고 가야 한다”고 했다. 그 다짐을 반드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앞서 윤석열의 내란으로 당이 쑥대밭 됐는데, 권영세 비대위원장·권성동 원내대표의 ‘쌍권’ 친윤 지도부가 정략적인 통합 구호로 쇄신을 흐려 결국 당을 소멸 위기로까지 몰아넣은 잘못을 되풀이해선 안 될 것이다. 지난 13일 공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당 지지율이 21%로 급락한 싸늘한 민심을 알아야 한다. 국민의힘이 진정 위기의식을 갖고 변화를 도모했다면 친윤부터 정치 무대 뒤로 사라지는 게 순리이고 염치다. 하지만 송 원내대표 당선으로 국민의힘은 ‘친윤·TK’ 정당 색깔을 빼기는커녕 그 세력들 기득권의 공고함만 보여줬다. 윤석열 정부 이후 원내대표 전원이 친윤계고, 권 전 원내대표를 제외하면 모두 TK 출신이다. 친윤·TK의 기득권 연장을 위한 또 한번의 돌려막기란 비판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송 원내대표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친윤 지지를 업고 당선됐더라도, ‘또 친윤이 당을 장악하고 당론을 좌우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친윤 극복을 시작해야 한다. 원내지도부 인선에서부터 친윤을 배제하고 쇄신파를 전면에 배치하길 바란다. 또 김용태 비대위원장이 제안한 탄핵 반대 당론 무효화 등 ‘5대 개혁안’을 추진해 쇄신 의지를 증명해야 한다. 정부·여당과의 관계에서도 과거와는 달라야 한다. 견제를 명분으로 대여 공세에 올인하면서 내부 쇄신 국면을 호도하려는 정략적 행태가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국민의힘이 환골탈태해 국민 신뢰를 획득할 때 건강한 야당으로서 견제·입법 역할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국민의힘은 정말 마지막이란 절박함을 가지길 바란다. 남양주음주운전변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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