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링크 APEC은 미·중 패권경쟁이 격화되면서 세 가지 구조적 변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삼중 전환’ 국면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패권 체제에서 미·중 양극 체제 혹은 다극 체제로의 이행이 가속화되고 있다. 패권안정이론이 예측하는 ‘공공재 공급 감소’와 국제 리더십 부재가 현실화되고 있다. 둘째, 자유무역과 상호의존 체제에서 ‘무기화된 상호의존’으로 전환됐다. 코헤인·나이의 복합상호의존론이 가정했던 평화적 효과는 사라지고, 경제적 연계가 오히려 강압의 도구로 변질되고 있다. 강대국들의 경제보복은 일상화되고 있다. WTO를 핵심으로 하는 다자무역 체제가 붕괴 직전이다. 셋째, AI, 반도체, 클라우드 등 4차 산업혁명 핵심 기술이 새로운 패권경쟁의 축으로 등장했다. 바이든 시기 “작은 영역, 높은 울타리” 전략으로 정의했던 미국의 선택적 디커플링은 트럼프 2기 들어 전면적·제도적 기술 블록화로 확대되고 있다.
미·중 전략경쟁이 야기한 격변과 혼돈의 국면에서 미국의 기존 지도부는 미국민들과 세계에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트럼프라는 강력한 리더십을 수용한 배경이다. 트럼프는 기존 미국의 대외 전략과 국제정치 구조로는 미국이 더 이상 중국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고, 미국의 국력은 급격히 쇠퇴하고 있는 현실을 인식했다. 미국 정부의 부채 이자만도 1년 국방비 예산을 넘어선다. 인프라나 국방비에 투자할 여력이 고갈됐다.
미·중 패권경쟁 승자는 이미 중국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기존에 상상도 못했던 발상의 전환을 단행했다. 시장의 규모와 접근성이 새로운 국력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잘 인식했다. 주요 정책 수단은 관세였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미국 제조업 부활, 군사력 현대화, 금융패권의 유지가 필요하다. 이 목표는 주로 동맹에 관세를 부과하고 투자를 강제하는 방식으로 달성하려 한다. 동맹은 그간 미국의 우산 아래 저비용으로 안보를 누렸고, 미국으로부터 무역이익을 확대해왔다는 인식이다. 동맹국은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가 높아서 자체 레버리지가 부족한 국가들이다. 일본은 5500억달러, 유럽은 6000억달러, 한국은 3500억달러 투자를 약속했다. 약탈적이고 무모해 보이지만 트럼프의 협상 전략은 먹히고 있다. 과거의 합리성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트럼프는 이 자금으로 미국 제조업을 부활시키고, 군사력을 현대화하며, 또 스테이블 코인과 같은 혁신적인 디지털 금융화폐 도입을 통해 금융패권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그린란드 귀속, 가자 통치, 러시아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배려한 우·러 전쟁의 종식 방안 등을 주저 없이 언급한다. 희토류 확보를 위해서는 말레이시아를 방문해 희토류 공급망 구축에 합의하고, 중국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중앙아시아로 달려가 5+1 회의를 개최했다.
이번 APEC 전후 미·중 간 상호 힘겨루기는 누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시진핑은 갑이었고, 트럼프는 을이었다. 트럼프의 비전은 미국의 국력을 조속히 재건해 중장기적으로 중국에 맞설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권력 공고화가 필요하다. 내년에 있을 중간선거가 중요하다. 중간선거에 승리하려면 반드시 경제를 안정시켜야 한다. 제조업을 장악한 중국의 도움이 없으면 트럼프의 목표 달성은 불가능하다. 중국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중국과의 타협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트럼프가 APEC에 급히 날아온 것도 시진핑과 타협을 도출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미국은 중국에 대한 레버리지가 거의 없다. 트럼프는 이를 잘 인식하게 됐다.
미·중관계의 현주소는 한·미 동맹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소 냉전의 상대적 안정성은 ABM 조약에서 보여주듯이 상호취약성 속에 가능했다. 그러나 중국이 추구하는 국가상은 그 취약성이 거의 없는 완전무결에 가까운 구성을 보여준다. 이는 주변국들에는 대단히 두려운 현상이다. 한·중 경제관계는 더 이상 상호보완적이지 않다. 세계 무대에서 중국과의 경쟁은 불가피하지만, 불가능한 상황이다. 한국에 기회는 오히려 한·미 동맹에서 나온다. 미·중의 공급망이 분리된다면, 한국은 미국과 서방에서 가장 강력한 제조업 국가이다. 한국이 지니는 제조업, 군사 역량 등은 미·중 전략경쟁에서 미국에 필수적인 자원들이 되고 있다.
틈새 낀 한국, 실용적 생존 전략 필요
미국은 테슬라나 엔비디아의 최근 대한국 투자 결정에서 보듯이, 한국 경제의 숨통을 틔워줄 역량을 지니고 있다. 트럼프 시기는 그 어느 시기보다 한·미관계의 보완성이 커지고 있다. 실용주의를 표방한 이재명 정부가 최근 보수·우경화, 친미 정책에 기울고 있는 현실적 이유이다.
한국은 APEC에서 틈새 외교로 부분적 성과를 달성했다. 조선이나 방산과 같이 미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전략적 자원을 잘 활용했고, 숙원이던 원자력 역량 강화를 위한 첫걸음을 떼었다. 전략적 유연성에 기반한 실용외교는 일본에 비해 성과를 가져왔다. 동시에 미·중 패권경쟁의 구조적 압력은 오히려 심화되었다는 점도 목도했다. 미·중 간 타협 속 반목은 더 깊어간다. 트럼프는 내부적으로 중국에 대항하기 위한 역량을 강화하려 제도적인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도 이를 잘 이해하고 있다. 전략적 자율성을 확대하고자 하는 한국 외교의 난도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을 지지하는 극우세력은 트럼프의 지지를 기대하면서 여전히 상당한 정치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국내 정치적 제약은 한국 외교의 유연성을 크게 억제한다.
미국과 위계적인 관계를 넘어 ‘동반자적’인 동맹관계로 동맹을 현대화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중국 및 러시아와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그 비용이 과다하다. 북한과의 관계도 안정시켜야 불필요한 안보 비용을 줄이고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을 도모할 수 있다. 이재명 정부는 이 난제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재명의 실용외교는 “구조적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제한된 공간에서나마 최대한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실용적 생존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성탄절을 한 달여 앞둔 24일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의 한 상점 입구에 산타 인형을 비롯한 크리스마스 상품들이 진열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