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정부성범죄변호사 두 차례 세계대전 겪고 미 대통령만 20번 봤다···갈라파고스 거북이 141세로 사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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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106.♡.235.98) | 작성일 | 25-11-27 09: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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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성범죄변호사 19세기에 태어난 미국 샌디에이고 동물원의 ‘명물’ 갈라파고스 거북이가 141살로 생을 마감했다.
26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샌디에이고 동물원 측은 갈라파고스땅거북 ‘그래마’가 고령에 따른 뼈 질환을 앓은 끝에 안락사됐다고 밝혔다. 동물원 측은 “그래마는 동물원의 야생동물 관리 전문가 가족들이 곁을 지키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샌디에이고 동물원의 ‘왕할머니’ 격인 그래마는 다정하고 수줍음 많은 성격으로 동물원의 ‘여왕’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름 그래마(Gramma)는 ‘할머니’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다. 그래마는 미국 제21대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1884년 갈라파고스섬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16년 샌디에이고 동물원이 개장하기도 전이다. 당시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대영제국을 통치하던 시기로 뉴욕에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지기도 전이었다. 이후 그래마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고 미국 대통령 임기를 20번 넘게 지켜봤다.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1809~1882) 역시 그래마와 인연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835년 다윈이 갈라파고스를 방문했을 당시 그래마의 부모 세대쯤 되는 거북들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래마는 갈라파고스섬에서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으로 옮겨진 후 40살을 넘긴 1928년쯤 샌디에이고로 와서 한 세기에 걸친 긴 여생을 보냈다. 갈라파고스땅거북은 키가 1.8m(6피트)까지 자라고 무게는 약 180㎏에 달하는 장수 동물이다. 호주 퀸즐랜드 남동부 동물원에 살던 갈라파고스 거북이 ‘해리엇’은 176세까지 살았다. 장수의 비결은 ‘정화’ 능력으로, 갈라파고스땅거북은 노화에 따라 축적되는 독성 물질을 생리적으로 정화하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산 거북이는 남대서양 세인트헬레나섬에 서식하는 세이셸코끼리 거북 ‘조나단’으로, 현재 190살을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갈라파고스땅거북은 멸종 위기종이기도 하다. 갈라파고스섬에서 확인된 갈라파고스땅거북은 총 15종인데, 이 중 3종은 이미 멸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불법계엄 선포를 방조한 혐의를 받는 한덕수 전 국무총리에 대한 1심 선고가 내년 1월 21일 나온다. 내란 관련 혐의로 기소된 국무위원 중 가장 빠르다. 조은석 내란 특별검사팀(특검)은 한 전 총리에 대해 “45년 전 내란보다 더 막대하게 국격이 손상됐고 국민에게 커다란 상실감을 줬다”며 징역 15년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한 전 총리는 직접 쓴 종이를 들고 읽으며 “절대로 계엄에 동의할 수 없고 대통령을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며 “계엄 선포로 국민이 겪은 고통과 혼란에 대해 가슴 깊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재판장 이진관)는 26일 내란 우두머리 방조·내란 중요임무 종사, 위증 등 혐의를 받는 한 전 총리의 1심 결심 공판을 열고 특검과 변호인단 양측 의견을 들었다. 우선 특검은 “피고인은 국무총리로 대통령 제1보좌기관이자 행정부 2인자이며, 국무회의 부의장으로서 대통령이 잘못된 권한을 행사할 때는 견제할 의무가 있다”며 “지난해 12월3일 내란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사람인데도, 국민 전체의 봉사자로서 의무를 저버리고 윤석열 전 대통령의 위헌·위법한 계엄 선포를 보좌했다”고 했다. 이어 “국가와 국민에 대한 피해가 막대하고, 사후 부서를 통해 절차적 하자를 치유해 12·3 비상계엄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시도한 점, 허위공문서 작성 등 사법 방해 성격의 범죄를 추가로 저지른 점, 진술을 번복하는 등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개전의 정이 없는 점이 양형으로 고려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특검팀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재판 일부를 언급하며 “45년 전 내란보다 더 큰 피해”라며 “엄히 처벌해 다시는 대한민국에서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특검은 당시 내란 중요임무 종사 등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은 주영복 전 국방부 장관에 대한 판결을 들어 “당시 법원은 주 전 장관에 대해 ‘다른 사람의 힘에 밀려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변명하는 것은 하급 관리의 일이고, 지위가 높고 책임이 막중하면 변명이 용납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며 “국정 2인자인 피고인 역시 마찬가지다. 납득할 수 없는 거짓 변명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했다. 한 전 총리는 최후 변론에서 직접 마이크를 잡고 계엄에 찬성한 적이 없다고 재차 주장했다. 한 전 총리는 “1970년 경제 관료로 입직해 한평생 공직의 길을 걸었다. 대한민국은 제게 많은 기회를 줬고 그에 보답하겠다며 살아왔다”며 “그 길 끝에서 비상계엄 선포 사태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날 밤 대통령이 계엄 선포를 하겠다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그 순간 기억이 분명치 않다. 절대로 계엄 선포에 동의할 수 없다며 대통령을 막으려 했지만, 도저히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어 “혼란한 기억을 복기할수록 제가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절망만 사무치고, 저는 그 괴로움을 죽는 날까지 지고 가야 하는 사람”이라며 “비록 계엄을 막지 못했지만, 찬성하거나 도우려 했던 일은 결단코 없다. 그것이 제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말”이라고 했다. 변호인단은 최후변론에서 특검의 공소장 변경이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처음 기소된 내란 우두머리 방조 혐의는 내란 우두머리 혐의에 대한 형법상 공범 개념인데, 내란 중요임무 종사를 추가한 것은 사실관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변호인단은 각 혐의에 대해서도 “내란 종사는 모의 참여·지휘 등의 행위를 해야 하는데, 윤 전 대통령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과 사실상 논의했다”고 주장했다. 앞서 한 전 총리는 대통령의 자의적 권한 행사를 사전에 견제·통제할 수 있는 국무회의 부의장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불법 비상계엄 선포를 방조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해 12월5일 강의구 전 대통령실 부속실장이 비상계엄 후 절차적 하자를 은폐하기 위해 허위로 작성한 계엄 선포 문건에 윤 전 대통령,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과 각각 서명하고 이를 폐기하도록 요청한 혐의도 있다. 또 지난 2월20일 윤 전 대통령의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의 증인으로 나와 ‘계엄 선포문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취지로 위증한 혐의도 적용됐다. 한 전 총리 재판에서는 계엄 선포 전후 국무회의 등 모습이 담긴 대통령실 폐쇄회로(CC)TV가 대중에 공개됐다. 특검팀은 문건을 든 한 전 총리의 모습 등이 담긴 영상을 근거로 그가 비상계엄 선포 사실을 미리 알았으며 이에 동조했다고 판단했다. 한 전 총리는 전체 계획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줄곧 주장했다. 그러면서 “계엄 선포 전 윤 전 대통령에게 ‘반대’라는 표현은 명확히 쓰지 않았지만, ‘재고해달라’는 입장을 여러차례 전했다”고 했다. 다만 헌재에서 ‘계엄 선포문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위증한 혐의는 인정했다. 재판부는 이날 재판을 종결하고 내년 1월21일 선고하기로 했다. 재판부는 “선고기일이 좀 늦어 재판부도 아쉬운 상황”이라며 “업무 상황 때문에 다른 업무를 조정해도 제일 빠른 기일”이라고 했다. 내가 독일에 있는 친구와 몇달간 집을 바꾼다고 했을 때 가장 눈을 빛낸 것은 엄마다. “유럽…” 엄마는 맛있는 거라도 상상하듯 말했다. 그녀의 말로 엄마는 육십이 넘도록 외국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태국도 가고 대만도 가고 일본도 다녀왔지만 외국은 아니었다. 엄마에게 외국은 ‘유럽’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렇게 배웠어.” 엄마는 말했다. 마침 엄마가 일을 쉬는 달이었다. 엄마가 일하는 노인일자리는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데, 그것도 1~2월엔 일을 주지 않는 공백기였다. 백수 신세인 셈이다. “오실래요?” 선뜻 물으려다가도 말끝이 흐려졌다. 날씨 좋은 계절에 엄마 친구들과 함께 가이드 끼고 오시면 좋을 텐데 생각이 들어서다. 물론 그럴 시간과 돈은 없어왔다. 그럼에도 생전 처음 가는 유럽이 이토록 해가 짧고 추운 겨울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 엄마의 눈빛이 유리알처럼 빛났다. 그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갈 수 있다는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나네.” 그래서 엄마의 비행기표를 끊었다. 만약 비행기를 타지 못한다고 해도, 엄마에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중요한 일이 될 것 같아서다. 엄마는 면사무소에서 준 달력에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내 생에 유럽이라니. 말도 안 돼.” 먼 곳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에 너무 많은 것이 담긴 것 같았다. 문제는 내가 먼저 떠나고 엄마가 나중에 오시기에, 엄마 혼자 이 먼 곳까지 오셔야 한다는 점이었다. 비행시간만 최소 15시간 이상이었다. 직항도 없었다. 이런 경우가 없을까 싶어 인터넷을 뒤져봤다. 없는 게 없다는 유튜브에도 환갑 넘은 아줌마 혼자 장기 비행을 도전할 때 팁을 알려주는 릴스는 없었다. 그제야 남편도 자식도 없이 먼 길을 혼자 떠나게 된 엄마의 운명이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효를 저지르는 것인지 불효를 저지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서울 가는 버스를 타는 것도 번번이 예매에 실패해 매번 나에게 전화를 거는 엄마였다. 영어도 모르고 여행은커녕 공항조차 혼자서는 가본 일이 없는 엄마였다. 나는 복잡한 공항 안에서 허우적대는 엄마를 금방 상상할 수 있었다. 빈 종이에 비행기 편명부터 커다랗게 적었다. “엄마가 타야 하는 비행기 이름이에요.” 가장 걱정인 것은 환승이었다. 수많은 표지판 사이에서 사람들 틈에 휩쓸려 엉뚱한 데로 가기 십상이었다. 휴대폰 사용도 어려울 뿐 아니라 와이파이를 얻기 위해 키오스크 등을 이용해야 했다. 물론 언어는 모두 영어이고 말이다. 엄마는 내가 영어와 그 발음을 대문짝만하게 쓰면 더듬더듬 따라 읽었다. “엄마. 내리면 트랜스퍼라고 쓰여 있는 표지판으로 쭉 가는 거야.” 나는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이라고 쓰고 엑스표를 그렸다. “여기는 가면 절대 안 돼.” 엄마가 물었다. “파이널, 데스티니?” “아니, 엄마. 그거는 운명이고. 이거는 데스티네이션. 목적지예요.” 엄마는 데스티네이션을 몇번 따라 읽었다. 그리고 불렀다. “데스티니~ 유얼 마이 데스티니~” 쓰다 보니 챙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공항에서 해야 할 일, 환승할 때 해야 할 일, 도착해서 해야 할 일, 공항 표지판 영어 단어장까지 내용이 너무 방대해져 결국 컴퓨터 문서로 다시 정리했다. 커다란 폰트로 인쇄했더니 A4용지로 14장이 되었다. 제목은 엄마 유럽 여행안내서였다. 내가 두 달 치 짐을 싸는 것보다 이걸 만드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혹시나 길을 잃었을 경우를 대비해 ‘○○번 비행기를 타는 길을 알려주시겠어요?’ 같은 말을 영어로 크게 인쇄한 카드도 제작했다. 언제라도 누구를 붙잡고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엄마는 내가 쓴 종이들을 끌어안고 침실로 갔다. 여전히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엄마는 해낼 수 있을까. 생의 가장 큰 비행에 성공할 수 있을까. 나는 엄마의 운명을 상상하고 있었다. 성남성범죄변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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