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이혼전문변호사 ‘아는 맛’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분명 몇 번이고 봤던 드라마인데, 자꾸 손이 가는 콘텐츠가 있기 마련이죠. 시트콤은 이 분야의 권위자라 할 만합니다. 짧고 많은 회차 동안 쉴새 없이 사고를 치는 등장인물들에 정이 들어버려서일까요. <순풍산부인과>, <거침없이 하이킥> 등을 여전히 돌려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옛 시트콤의 맛을 잊지 못하는 건 우리만의 일은 아닙니다. 미국에는 <오피스>와 <프렌즈>가 있거든요. 2018년 한 리서치 업체가 넷플릭스 전체 콘텐츠 조회 수의 7.19%가 <오피스>를 보는 데, 4.13%가 <프렌즈>를 보는데 쓰였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을 정도입니다.
옛 시트콤 애호가들이 오래 버텨준 덕택일까요. <오피스>가 종영하고 12년이 흐른 2025년 9월, 그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모큐멘터리(다큐멘터리로 가장한 픽션) 시트콤이 NBC의 온라인동영상서비스 피콕에 공개됐습니다.
<오피스>(The Office)가 제지 회사 ‘던더 미플린’의 미국 펜실베니아 스크랜튼 지점의 직원들을 카메라에 담았다면, 새로운 스핀오프 시리즈 <더 페이퍼>(The Paper)는 종이가 아닌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합니다. 미국 오하이오의 지역지 ‘트루스텔러’ 사무실이 배경이죠. 이곳은 던더 미플린과도 연관이 있는 곳입니다. 던더 미플린을 2019년에 합병한 제지회사 에너베이트의 자회사 중 하나라는 설정이거든요.
‘진실을 말하는 이들’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비해 트루스텔러는 사실 신문사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입니다. 수십 년 전에는 수백 명이 근무하며 진실만을 좇았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층을 쓰는 화장지 사업팀의 눈칫밥을 먹는 골칫덩이죠. 제대로 된 기자는 없고, 구독하고 있는 AP 등 통신사의 가십 기사로 지면을 채울 정도로 망가진 곳입니다.
<더 페이퍼>는 다 쓰러져가는 지역 신문사에 열정 넘치는 편집장 네드(도널 글리슨)가 부임하며 벌어지는 소동을 담습니다. 임시 편집장을 맡았던 에스메랄다(사브리나 임팍치아토레)에게 ‘쓸데없는 짓’을 벌이려는 네드는 눈엣가시죠. 사실상 기자 경험이 있는 직원이 한두 명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된 네드는 ‘일단 어떤 직군이든 기사를 쓰고 싶으면 오라’고 부탁합니다. 네, 다음부터는 손발 안 맞는 오합지졸의 난장판이 벌어지죠.
저 또한 신문사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더 페이퍼>의 오프닝은 이보다 웃플 수 없습니다. <오피스> 오프닝을 연상케 하는 잔잔한 배경음에, 신문을 읽기보다 신문으로 접시를 싸고, 음식 깔개로 쓰고, 구기고 버리는 온갖 합법적 훼손 장면이 나열됩니다. 신문보다는 종이로서의 쓸모를 다하는 ‘페이퍼’의 모습입니다.
촬영부터 웃음 설계까지 <오피스>를 그대로 이식한 작품입니다. 직원들의 사회생활이 탑재된 (거짓) 리액션을 관찰자적으로 담다가, 그 속내를 인터뷰 컷으로 삽입해 웃음을 자아내는 게 똑 닮았습니다. 반가운 얼굴도 있습니다. 던더 미플린 회계팀 직원 오스카(오스카 누녜즈)가 트루스텔러로 옮겨와 일을 하고 있던 건데요. 제작진을 마주치자마자 “9년이나 따라다녔으면 됐지, 더는 안 한다”고 벌컥 화를 내는 깨알 같은 포인트도 있습니다.
네드도 시청자처럼 트루스텔러가 처음인 만큼 그가 사무실에 녹아들 때까지, 또 시청자들이 캐릭터들에 정감을 느낄 때까지 예열 시간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래도 30분으로 짧은 한 편, 한 편을 보다 보면 슴슴하니 계속 이어 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분명 처음 보는데 알던 맛이라서일까요. 반가우면서도 심심하고, 궁금하면서도 알 것 같은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쿠팡플레이에서 시즌1(총 10회)을 볼 수 있습니다. 시즌2 제작도 확정됐습니다.
오합지졸 지수 ★★★★☆: 네드가 첫날 도망가지 않은 게 수상할 정도
밥친구 지수 ★★★★: 짧아서 후루룩 후루룩
지난달 22일 개봉한 윤가은 감독의 신작 <세계의 주인>이 이례적인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개봉 4주 차 누적 관객 수가 9만 명을 넘어섰다. 조만간 10만 관객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극장가의 깊은 침체, 1만 관객만 들어도 흥행으로 여기는 독립영화계 상황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다.
11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세계의 주인>은 10일 기준 누적 관객 수 9만2108명을 기록했다. 개봉 4주 차임에도 박스오피스 6위에 올라있을 뿐 아니라, 좌석판매율도 두 자릿수를 넘겼다. 상영관이 축소된 상황에서 오히려 좌석판매율은 상승추세다.
<세계의 주인>은 섬세한 청소년 서사를 다뤄 온 윤가은 감독의 3번째 장편영화로, 열여덟 여고생 ‘주인’이 전교생이 참여한 서명운동을 홀로 거부한 뒤 의문의 쪽지를 받기 시작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윤 감독의 전작 <우리들>(2016)과 <우리집>(2019)은 각각 5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했는데, 세번째 영화로 전작들의 흥행기록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앞서 지난 2월 개봉한 독립영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는 누적 관객수 11만8094명을 동원하며 흥행했는데, <세계의 주인>이 이 기록을 넘을지도 관심이다.
흥행의 원동력은 강력한 입소문에서 나왔다. <세계의 주인>은 SNS와 영화 커뮤니티에서 ‘요즘 난리난 영화’로 통한다. 대규모 홍보나 스타 마케팅, 엄청난 반전이 있는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개봉 직후 영화를 본 관객들 사이에서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극찬이 이어지며 빠르게 입소문을 탔다.
“아무 정보도 찾아보지 말고 보라”는 ‘노(No) 스포일러 챌린지’도 유행처럼 번졌다. 개봉 전 윤가은 감독이 “중심인물과 사건에 대한 핵심 정보를 모른 채 볼 때 더 큰 영화적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며 주인공이 과거에 겪은 일을 리뷰로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 것이 계기였다. 줄거리 정보와 구체적인 감상 공유가 제한된 채 관람이 권장되자 오히려 관객들 사이에서 궁금증이 커지며 흥행에 기세를 더했다.
관객뿐 아니라 동료 영화인들의 응원과 ‘샤라웃(Shout-out, 공개적 지지)’도 힘을 보탰다. 영화 <얼굴>로 <세계의 주인>과 함께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연상호 감독은 “보법이 다른 윤가은 감독님의 걸작”이라는 호평을, 배우 박정민은 “엄청난 것이 나와버림”이라는 감상평으로 기대를 자아냈다.
<세계의 주인>의 흥행은 한국 영화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관객을 극장으로 이끄는 ‘좋은 영화의 힘’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전작들에서 초등학생을 주인공으로 아이들의 우정과 혼란을 섬세히 담았던 윤 감독은 이번엔 10대 후반 고등학생들에게 렌즈를 드리웠다. 관계의 균열, 가정 문제, 폭력과 상처 등 아이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특유의 섬세함과 깊이 있는 시선이 관객의 마음을 붙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례적 흥행에 힘입어 윤 감독의 2013년 단편영화 <콩나물>이 12일부터 전국 CGV아트하우스에서 상영된다. ‘콩나물’은 할아버지 제삿날, 바쁜 엄마 대신 콩나물을 사기 위해 생애 처음 집밖으로 홀러 나선 일곱 살 소녀 보리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같은 날 봉준호 감독이 참여하는 <세계의 주인> 관객과의 대화(GV)가 서울 삼성동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열리며 흥행의 열기를 이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