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테크 신용불량자 충남 태안군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작업하다 숨진 재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김충현씨의 발인이 사고 발생 16일 만에 이뤄졌다. 정부는 태안화력발전소 중대재해 사망 사고 관련 협의체를 구성해 운영하기로 했다.
발인은 18일 김씨의 빈소가 차려진 태안군보건의료원 상례원에서 진행됐다. 모친은 영정을 보며 흐르는 눈물을 연신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김씨 빈소 앞에는 ‘한전KPS와 서부발전의 조문은 사양합니다’라는 안내문이 걸렸다. 김씨와 40년 넘게 알고 지낸 임동성씨(49)는 “사고가 난 지 2주가 넘었음에도 사측에선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며 “사고 책임을 피하는 데 급급한 사측의 태도에 울화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엄길용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위원장은 “고인의 죽음은 개인의 잘못이 아닌 이 사회가 잘못됐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며 “고인의 명예를 바로잡는 길이 다소 시간이 걸리고 험할 수도 있겠지만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영결식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치러졌다. 김씨의 친형은 “충현이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많은 분들이 함께해줬다. 동생도 마음 편히…”라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표는 “2018년 고 김용균 노동자가 그러했듯이 가장 충실하게 일했던 것이 죄가 돼 소중한 목숨을 잃었고,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죽음의 상징처럼 돼버렸다”며 “외주화를 시정하라는 권고를 정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고 결국 또다시 동료를 떠나보내게 됐다”고 말했다.
영결식 뒤 유족과 동료들은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비정규직 정규직화, 위험의 외주화 중단, 중간착취 근절 등을 요구하는 글이 적힌 만장과 함께 사고 현장인 한전KPS 태안사업처 공작기계실까지 행진했다.
‘태안화력 고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고 대책위원회’는 1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약속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무기한 노숙농성에 돌입할 계획이다.
정부는 대책위와 협의체를 구성해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고용노동부는 이날 국무조정실 사회조정실장 주재로 노동부 산재예방감독정책관, 산업통상자원부 전력정책관이 참석한 관계부처 회의를 열었다.
정부는 “빠른 시일 내 대책위와 구체적인 협의체 구성 방안과 의제, 운영 방식 등에 있어 모든 것을 열어놓고 협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북 지역 국회의원과 교육감 후보자 후원회에 타인의 명의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기부한 후원인 A씨가 검찰에 고발됐다.
전북선거관리위원회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A씨를 전주지방검찰청에 고발했다고 20일 밝혔다.
전북선관위에 따르면 A씨는 2022년 5월 전북교육감 후보자 B씨의 후원회에 가족과 회사 직원 등 12명의 명의로 1인당 500만원씩 총 6000만원을 기부했다. 이어 2024년 5월에는 국회의원 C씨와 D씨의 후원회에 가족 등의 명의로 각각 2000만원(4명), 1000만원(2명)을 기부한 것으로 드러났다. 총 기부액은 9000만원에 달한다.
정치자금법에 따르면 개인이 연간 기부할 수 있는 총액은 2000만원을, 하나의 후원회에는 500만원을 초과할 수 없다. 또한 누구든 타인의 명의나 가명으로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를 위반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기부 한도 초과 시), 200만원 이하의 벌금(타인 명의 기부 시)에 처해질 수 있다.
전북선관위는 “타인 명의 기부와 기부 한도 초과 등 정치자금 불법 후원이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며 “위반행위가 확인될 경우 철저히 조사해 엄중 조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어 “후원인과 후원회 관계자를 대상으로 한 예방 교육과 안내도 지속해서 강화하겠다”고 덧붙였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1581년(선조 14년) 10월11일,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져 낮에도 캄캄하고 천둥 번개가 크게 쳤다. 닷새 뒤 임금이 이 재이(災異), 즉 기상이변에 대해 대신들을 맞아 자문했다. 영의정, 6조 판서, 한성판윤 등이 입궐했다. “천변이 비상하니 어떻게 대응해야 하겠는가”라고 임금이 물었다.
조선시대에는 ‘천견설’ ‘천인감응론’이라는 이론이 있었다. 임금이 덕을 잃으면 하늘이 재이를 일으켜 꾸짖고, 인간의 행위와 하늘의 현상이 상호작용한다는 주장이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보다 자연에 기대어 사는 비중이 훨씬 높았기에 사람들이 자연현상에 더 민감했다. 그래도 임금과 신하들이 두 이론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재이가 발생하면 국정의 잠재적 위험과 문제점을 점검하는 기회로 삼곤 했다. 실제로 재이 대응책을 묻는 임금의 태도가 다소 형식적이자 호조판서 이이가 이를 지적했다.
“재이는 잘 다스려진 세상과 어지러운 세상의 갈림길에 국정이 놓였을 때 일어납니다. 우리 왕조가 개국한 지 200년이 지났으니 이때가 바로 중엽의 쇠퇴해지는 때입니다. 권력을 가졌던 간사한 신하들이 이미 여러 차례 조정을 어지럽히는 화를 겪었습니다. 지금은 마치 노인이 원기가 거의 쇠진하여 다시 떨치고 일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장차 국정이 바르게 다스려질 것인가 어지러워질 것인가의 분기점입니다.”
계속해서 이이가 말했다. “임금이 큰일을 하려면 반드시 큰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것을 기약하고 자신이 먼저 한 시대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이상도 실제 정책으로 옮기지 않으면 이 역시 선한 마음만 갖는 데 불과합니다. 평범한 논설 따위는 채택하여 시행해도 끝내 실효가 없습니다. 먼저 대신들로 하여금 의논하여 하나의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하고, 국정 현안을 환히 알고 나랏일에 유념하는 사람을 거기에 임명하소서. 그리고 모든 제안을 곧바로 그 기관에 하달하여 상의해서 결정케 하소서. 이렇게 국정의 폐단을 개혁하면 하늘의 뜻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이는 또 “어진 이를 높이고 학문을 숭상해야 하는데 조광조·이황은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말했다. 선조는 두 제안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581년 10월16일 조정 논의에서 두 가지가 주목된다. 하나는 이이가 말한 사항들이고, 다른 하나는 실록 기록 자체다. 이이는 조선왕조 전체에서 자기 시대가 어떤 지점에 있는지 400여년 뒤 우리가 봐도 공감할 수준으로 지적해냈다. 대한민국과 지금을 대상으로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이이가 제안한 두 사안은 이이 사후에 실제로 이루어졌다. 조광조·이황 등에 대한 문묘 종사는 1610년(광해군 2년) ‘5현 종사’로, 경제사는 후일 대동법을 주관하는 선혜청 설립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이의 주장을 따른 것이라기보다 이이가 간곡히 말한 절실한 국정 현안이 결실을 본 것이다. 또, 이날의 조정 논의 전체는 실록에 적힌 것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보는 글로 정리해낸 것은, 당시의 사관들과 실록 편찬자들이 자기 시대의 맥락을 이해했다는 뜻이다.
이이는 자기 시대를 ‘중쇠기’로 규정했다. 한국에 대해 근년에 비슷한 진단이 이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 6개월간 이어진 내란 상황 끝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대통령 후보자 TV토론에서 가장 나이 어린 후보자가 사실과도 다른 말을 인용해 다른 후보자에 대한 혐오를 선동하는 물의를 빚었다. 그러고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파면된 전임 대통령은 상식과 헌법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상식과 헌법을 파괴하는 전도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말은 말하는 사람의 식견과 내면의 풍경을 비춘다. 공적인 말은 시대에 공명한다. 단정하고 간절해야 한다.